[역경의 열매] 최공열 (13) 2002 월드컵 ‘4강 신화’ 밑거름을 자원하다
입력 2011-11-22 17:46
1999년 4월, 한국기독교지도자회에 참석한 나는 최해일 신신묵 박태희 목사님 등 임원진의 걱정과 한숨 소리를 들었다. 한숨을 내쉰 이들은 일본에 다녀온 목사님들이었다.
“일본에 가서 보니 2002 한·일월드컵 준비가 우리에 비해 매우 잘 되고 있습니다. 운동장도 잘 시공되고 있고요. 대한민국은 아직 운동장 공사가 제대로 되지 않고 무엇 하나 준비된 게 없어 보이니 큰일입니다.”
최 목사님의 제안으로 참석한 목사님들은 걱정을 넘어 ‘월드컵 성공을 위해 기독교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놓고 논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정이 넉넉지 않았던 한국교회가 국가 행사인 월드컵 준비를 위해 나설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논의 끝에 월드컵 준비는 ‘믿는 사람들이 먼저 친절하게 손님을 맞고, 먼저 질서를 지키며, 청결하고 정직한 시민이 되자’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에 따라 기독교인들이 청소운동을 벌이고 교회나 개인주택을 해외관광객 및 선수들을 위한 민박집으로 개방해 섬겨보자, 이번 대회로 관광객들이 다시 찾고 싶은 한국을 만들자는 등의 제안이 나왔다.
하지만 한국교회를 대신해 누가 이 운동을 앞장서야 할지 가장 큰 문제였다. 선뜻 아무도 나서지 않는 가운데 내가 자원해 손을 들었다. 월드컵 기독시민운동에 나선 이유는 간단하지만 명확하다. 2002월드컵은 선교의 좋은 기회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회와 남전도회 활동을 거쳐 많은 조직을 만들었고 법인도 세운 바 있다 보니 거칠 것이 없었다. 여기엔 웬만한 일은 두려워하지 않는 내 성격도 한몫했지만 말이다.
내가 나서자 그 자리에 있던 목사님들은 두 손을 들고 반기며 ‘모든 일은 최공열 장로에게 위임한다’고 동의해줬다. 나는 그 즉시 개인 사무실로 돌아와 ‘2002월드컵기독시민운동협의회’의 조직규칙을 정하고 발기인 승낙 서류를 만들어 박세직 장로를 찾아갔다. 박 장로는 88올림픽 조직위원장을 지낸 경험이 있었다. 그분께 운동 취지를 설명하고 발기인 위촉장을 드리니 흔쾌히 서명해 주셨다. 감사할 일은 연이어 일어났다. 당시 2002월드컵문화운동시민협의회 회장을 맡고 있던 이영덕 전 총리 역시 기꺼이 우리 조직의 발기위원이 돼 주시기로 한 것이다. 게다가 이 전 총리는 “최 장로가 ‘언제쯤 뜻 있는 일을 가지고 오려나’ 기다렸는데 정말 참 좋은 일을 갖고 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동안 남전도회와 100주년 단상을 꾸미며 만났던 인연들이 빛을 발하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월드컵 기독시민운동은 99년 9월 서울 장충동에서 대표회장 김준곤, 공동회장 조용기, 상임회장 신신묵 목사님 등과 함께 힘차게 출발했다. 사무총장을 맡은 나는 2000년 경기가 치러지는 국내 10개 도시와 일본 10개 도시와의 자매결연식 및 기독교 선교세미나를 개최하며 한·일 양국의 월드컵 성공과 일본의 복음화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나부터, 크리스천부터 친절(Kind), 봉사(Service), 청결(Clean), 정직(Honest), 질서(Orderly)를 실천하자는 의미를 담아 각 단어의 첫 자를 딴 ‘KS.CHO’ 캠페인도 활발히 진행했다.
2002년 3월 부활주일엔 월드컵 성공을 기원하는 한국교회의 뜻을 모으자는 취지로 전국 10개 개최도시 월드컵 경기장에서 부활절 연합예배와 월드컵 성공다짐예배를 드렸다. 당시 상암벌을 가득 채운 6만5000명의 함성과 염원은 몇 달 뒤 월드컵 4강 신화를 비롯한 대회의 성공적 개최에 밑거름이 됐다.
정리=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