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약국

입력 2011-11-21 10:06

교회 다니는 게 창피하다

드디어, 유수한 일간 신문의 한 지면에 교회 다니는 게 창피하다는 선언이 등장했다. 그동안 교회와 교회를 구성하는 이들의 자랑스럽지 못한 이야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도 어떤 종교의 무용론 내지는 종교 그 자체를 창피하다고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지난 15일자 중앙일보 34면에 김현진이라는 여성이 ‘교회 다니는 게 창피한 세상’이라는 타이틀로 글을 올렸다. 글쓴이의 부친은 개척교회 목사로 살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목회자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자랐는데, 막상 사회에 나와 보니 이렇게까지 기독교인이 욕을 먹는지는 몰랐다고 한다. 그녀에 의하면, ‘쟤 교회 다닌데’라는 말이 과거에는 ‘착하겠구나’ ‘좀 재미는 없지만 다른 사람을 해치지는 않겠구나’고 여겼단다. 그런데 요즘에는 ‘누구누구 교회 다닌대’ 할 때 아무도 ‘착하다’고 생각지 않는단다. 오히려 땅값도 잘 알고, 세금 피하는 법도 훤할 것 같고, 시세차익 같은 것도 쫙 꿸 것 같은 생각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게 창피하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아직 세상 물정을 잘 모르거나, 이제 갓 교회 밖으로 나와 교회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크거나, 어느 한 면에 대한 지극히 단편적이고 주관적인 생각을 객관화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 “나는 교회 다니는 게 창피하지 않은가?” 좀 더 역설적으로 “당신은 교회 다니는 게 자랑스러운가?”

얼마 전에 완득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중국과 필리핀에서 어떤 행사 참여 차 한국에 들어와 있던 선교사님들과 함께였다. 큰 줄거리는 다문화가정 이야기다. 저들을 이물스럽게 대하거나 배척하지 말고 이 시대의 ‘이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영화의 주제를 그렇게 읽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숨겨진 주제 하나를 더 달고 있었다. ‘교회란 무엇인가!’였다. 이른바 ‘교회론’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교회론’이 뭔가? 교회가 있어야 하는 당위성과 교회가 해야 할 존재의 목적을 포괄적으로 아우르는 말이다.

교회는 몇몇의 종교적이고 교리적인 행위를 하는 개인이나 집단의 공간이거나, 개개인의 욕망을 하늘이나 절대자에게 투사하여 성취하는 성역이거나, 세상과 구별하여 특별한 부가가치를 획득하는 공급소가 아니다. 교회는 ‘사람을 살리는 곳’이고, ‘사람과 신이 하나 되어 신명을 이뤄가는 곳’이다. 이것을 교회론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일반인이 알기 쉽게 풀어낸 뜻이다.

완득이라는 영화는 바로 그 교회론의 완결판이었다. 이 시대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교회들이 더 이상 욕을 듣지 않으려면, 교회 다니는 게 창피하지 않으려면 어떤 공동체적인 가치관, 공동체의 이론, 즉 교회론을 가져야 하는가를 말하는 거였다. 완득이 영화에 나오는 선생 ‘동주’가 오늘날 ‘성직자’다. 그는 말한다. “내가 전도사다. 왜냐하면 내가 돈 주고 교회를 샀고, 여기서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살리는 일’, 그것이 그에게는 교회의 목적이며 방향이었던 셈이다. 교리적인 울타리에 교회가 갇혀 있는 동안, 그래서 교회가 왜 있어야 하는지를 모르고 허둥댈 때, 동주라는 사람을 통해, 세상이 교회의 제 얼굴을 찾아서 우리에게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는 김현진이라는 젊은이가 일간 신문에 ‘교회 다니는 게 창피하다’고 광고를 해 대는 것과 또한 같다. 마땅히 교회가 해야 할 일을 상실하고 엉뚱한 길로 가고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사람 살리는 일’ ‘이웃을 위해 사는 일’을 뒤로 하고 ‘저만 사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는 세상의 비난이라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완득이가 되었다. 본시 완득이가 세상을 구원해야 했지만, 지금은 세상이 완득이를 구해야 한다. 참으로 민망한 역설이지만, 교회가 세상과 세상 사람을 구원하는 게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구원하는 지경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연유로 교회 다니는 게 창피하게 된 것이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르게 될 것이다.”(눅 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