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라의 수다] 솔직함과 예의
입력 2011-11-17 18:22
1990년대 말 제인 오스틴 소설이 영화화되어 인기를 얻을 무렵 영어시간에 제인 오스틴을 공부한 적이 있다. 학습목표는 예의바른 행동과 소설 속 인물의 세련된 영어 표현을 익히는 것이었다.
‘솔직함과 예의바른 행동 중 무엇이 더 중요한가?’에 대해 에세이를 썼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의견은 가지각색이었다. 내 친구 카티야는 솔직함이 상대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예의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견이었다. 나는 최대한 솔직하고 최소한의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썼다. 그리고 사회를 살아가면서 항상 그 원칙을 지키려 노력했다.
그런데 한국에 오고 난 후로는 그 원칙을 지키기가 힘들어졌다. 이 나라에서는 솔직함과 예의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한국에 사는 외국인 대부분이 외모에 대한 비평을 듣고 당황했던 경험이 있다. 코가 크다느니 엉덩이가 뚱뚱하다느니 얼굴에 주름이 많다느니 하는 말은 유럽에서는 예의상 금기시되는 말이다. 그래서 그런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한국인을 보면 기가 막히고 황당하지 않을 수 없다. 외국인에게는 매우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인데 한국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그런 말을 들었을 때 ‘과연 그 말을 하는 상대의 의도가 무엇일까’ 하고 의아해했다. 외모의 결함이야 거울을 보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인데 왜 굳이 직접적으로 일러줘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한국인 친구들은 나쁜 뜻으로 한 말이 아니니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했다. 한국인들이 상대에 대한 관심을 표현하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관심의 표현이라면 결점이 아니라 장점을 말하는 것이 훨씬 좋지 않을까? 결점을 말하고 싶다면 바로 고칠 수 있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큰 코와 뚱뚱한 엉덩이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이야기하면서 이 사이에 고춧가루가 끼고 화장이 얼룩지고 바지 지퍼가 열린 채 돌아다녀도 아무 말 안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이상하다.
한국인들은 그런 말이 듣는 사람에게 얼마나 기분 나쁜 것인지 모른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말을 듣고 기분 상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단 중국인들은 고향에서 길들여져서 그런지 그런 직접적 비평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며칠 전 한 친구는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코 크다고 시끄럽게 떠들어댔다는 말을 하면서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안 그래도 큰 코 때문에 콤플렉스가 많은데 대놓고 그런 말을 들었으니 크게 상처를 받은 것이다.
한번은 한국인 친구가 절대 한국인에게 머리 크다거나 다리 짧다는 얘기 하지 말라, 화낼 수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외국인도 똑같다. 코 크고 엉덩이 뚱뚱하다는 말을 들으면 화난다. 왜 한국인들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외국인이라고 해서 그런 말 하는 상대 한국인에게 할 말이 없을 것 같은가? 아니다. 최대한의 솔직함과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안 하는 것뿐이다.
베라 호흘라이터(tbs eFM 뉴스캐스터) 번역 김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