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옥의 Art Talk] 창조적 베끼기

입력 2011-11-17 18:08


21세기는 새로운 인재상을 요구하고 있다. 바로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창의적인 인간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창의성이나 아이디어라는 단어만 들어도 주눅이 들게 마련이다. 이런 범인(凡人)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창의성 전문가인 데이비드 코드 머레이는 “이 세상에 독창적인 것은 없다. 천재성은 얼마든지 남에게 빌릴 수 있다”고 평범한 사람들의 귀가 번쩍 뜨일 주장을 펼쳤다.

머레이에 따르면 뉴턴은 ‘만유인력 법칙’의 토대가 되었던 유율법(流率法)을 발표했을 때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훔쳤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뉴턴은 ‘아이디어를 창조적으로 베꼈다’는 스마트한 답변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더 멀리 바라보기 위해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서야 했습니다.”

창의성도 빌린다는 머레이의 주장을 입증하는 사례들은 미술계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술가는 팝 아트의 거장 로이 리히텐슈타인이다. 리히텐슈타인은 대중들에게 친근한 만화이미지를 순수미술에 융합한 업적으로 미술사의 별이 되었다.

이 작품을 보라. 그 시절에 그려졌던 통상적인 그림들과는 너무도 다르다. 금발의 미녀가 하얀 장갑을 낀 손을 머리에 대고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을 그렸는데 언뜻 보면 만화처럼 느껴진다. 아니, 영락없는 만화다. 실제로 리히텐슈타인은 대중들이 즐겨 읽는 순정만화의 한 장면을 캔버스에 그대로 베꼈다. 제목도 말풍선 속의 첫 단어에서 따왔다. 즉 ‘화면’ ‘칸의 분할’ ‘말풍선’ 등 만화의 양식과 기법을 몽땅 베낀 셈이다. 원작만화와 다른 점이란 그림 사이즈 정도다.

리히텐슈타인은 왜 만화를 베꼈을까? 그리고 만화를 카피한 그림이 어떻게 걸작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을까? 리히텐슈타인은 지금껏 어떤 화가도 시도한 적이 없었던 색다른 형식의 그림을 창안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만화에 열광하는 두 아들에게 미키마우스를 그려주다가 아이디어를 얻었다. 리히텐슈타인은 시각적 호소력이 강한 만화처럼 재미있고도 쉽게 감상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형식의 미술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대중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만화의 양식과 인쇄기법을 빌려와 순수미술에 융합한 것이다. 이는 “만화의 진짜 목표는 의사소통이다”라는 그의 어록에서도 드러난다.

다시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을 감상해 보자. 이 그림을 어렵다고 느낄 감상자가 있을까? 말풍선만 읽어도 그림의 의미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데 말이다. 금발미녀는 연인을 기다리고 있지만 그는 오지 않는다. 여자는 자신이 바람맞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한다. ‘아마도 그이는 몸이 아파서 스튜디오를 떠날 수 없었을 거야.’

그러나 당대의 예술가들은 만화가 지닌 힘을 간과했다. 순수미술가들에게 만화란 대중적 취향을 겨냥한 통속적이고 저급한 상업미술에 불과했다. 이들이 미술이란 진지하고 고상하고 초월적인 것이라는 예술관을 고집하고 있었을 때 리히텐슈타인은 소비자인 감상자의 눈으로 미술을 보았다.

단순히 만화를 복제했다면 리히텐슈타인의 이름은 미술사에 등재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창조적으로 만화를 베꼈다. 예를 들면 ‘벤데이 도트(Benday-Dot: 여러 개의 점으로 그림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인쇄업자 벤데이 이름에서 유래)’로 불리는, 공판 인쇄과정에서 생기는 특징적 질감의 망점을 수작업으로 그리기 위해 새로운 기법을 개발했다. 구멍이 뚫린 알루미늄 눈금판을 캔버스에 대고 붓(혹은 칫솔)에 잉크를 묻혀 판에 붓질했다. 미술전문가들은 인쇄된 만화이미지를 예술가가 다시 그린다는 파격적인 발상에 감탄했다. 오죽하면 팝아트의 황제 앤디 워홀이 “아, 나는 왜 그런 발상을 미처 하지 못했지?”라고 부러워했을까. 리히텐슈타인은 만화양식과 인쇄기술을 빌려와도 예술품이 되는 길을 열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을 미술로 증명했다.

‘카피캣(copycat)’의 저자 오데드 센카는 단순히 베끼는 수준을 뛰어넘어 창조적인 빌려오기를 시도한 사람들을 가리켜 이모베이터(Imovator·모방가를 뜻하는 Imitator와 혁신가인 Innovator의 합성어)라고 부른다. 리히텐슈타인은 미술계의 창조적 모방가다.

사비나미술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