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관계속에 투영된 ‘해적의 맨얼굴’
입력 2011-11-11 17:24
해적국가/피터 아이흐스테드/미지북스
국제해사기구(IMO)에 따르면 지난 1∼9월 소말리아 해적의 납치 기도는 352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3건이 늘었다. 2009년 한해 217건과 비교해도 성장세다. 석해균 삼호주얼리호 선장이 퇴원하고, 해적 아라이가 법정에 섰대도 마찬가지다. 해적질은 여전히 성장산업이다.
‘전쟁과평화보도연구소(IWPR)’ 아프리카 담당 편집자로 활동해온 피터 아이흐스테드의 ‘해적국가’는 소말리아 해적의 탄생비화이자 성장기, 혹은 이해당사자별로 따져본 손익계산서라고 불러도 좋겠다. 해적을 잉태시키고 키운 토양은 무엇인가. 해적 덕에 누가 득을 보고 누가 고통을 당하는가. 그걸 알아야 해적을 없앨 묘안도 생길 터이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 600달러 빈국. 지난 20년 그 가난한 땅에서 벌어진 천박하고 적나라한 이권다툼이 여기 책 속에 있다. 더불어 미국의 잘못된 대외정책이 소말리아를 어떻게 ‘제2의 아프가니스탄’으로 몰아가는지 역시 확인할 수 있다.
해적 이용하기
2008년 케냐 남부 몸바사로 향하던 우크라이나 회사 소유의 MV파이나호가 소말리아 해적에 납치됐다. 배에는 구소련제 T-72 탱크 33대, 유탄발사기 150대, 대공포 6문이 적재돼 있었다. 몸이 단 건 뜻밖에 미국이었다. 즉시 군함을 파견하고 봉쇄작전에 나섰다. 놀란 해적들 사이에 ‘MV파이나호의 최종 목적지가 케냐가 아니라 분리독립운동 중이던 남수단’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남북 수단은 종교와 인종 갈등으로 두 차례 내전을 거쳤다. 미국은 남수단편이었다. 기독교 국가 남수단이 무슬림국 수단으로부터 독립해 든든한 우방이 돼주길 바랐다(남수단은 지난 7월 수단으로부터 독립했다). 미국이 마음만 준 건 아니다. MV파이나호에 적재된 건 미국의 신호 아래 지원된 무기. 해적은 이걸 탈취한 것이다. 해적을 배후조종한 건 수단 정부일 가능성이 높았다. 미국 입장에서 무기가 수단 정부 손에 떨어지는 건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결국 갑판 위로 몸값 320만 달러가 투척됐다.
MV파이나호는 소말리아 해적이 국제정치에서 하나의 ‘세력’으로 이용되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미국은 수단 정부에 타격을 주고자 했지만, 타격을 입은 건 미국이었다. 수단은 세계 최강대국을 향해 주먹을 날렸고, 해적은 돈을 챙겼다.
먹이사슬
돈만 주면 불법이 두렵지 않은 해적의 유용함에 눈뜬 건 수단 정부만이 아니었다. 모두들 해적질을 비난하면서 해적이 결코 소탕되지 않는 이유. 무기였다.
현재 소말리아는 내전 중이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임시정부가 힘을 못 쓰는 사이에 북부 푼틀란드는 해적 본거지로, 남부는 알샤바브라는 이슬람 극단주의 그룹이 장악했다. 싸울 때 절실한 건 무기다. 하지만 1992년 유엔의 무기금수 조치로 소말리아 내 무기 반입은 금지된 상태. 무기가 필요한데 길은 막혔다. 해결책은 밀수의 최정예 부대, 역시 해적이었다.
해적은 해군을 따돌리고 무기를 들여오는 대가로 알샤바브로부터 현금과 AK 자동소총, 군사훈련 같은 걸 받아냈다. ‘알샤바브와 소말리아 해적들의 정략결혼’인 셈이다. 흥미롭게도 알샤바브는 1990년대 미국이 지원한 이슬람 단체의 후신이다. 제 발등을 찍은 셈. 소련에 저항한 이슬람 세력을 지원했다가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을 키운 아프가니스탄과 유사한 상황이다.
알샤바브와 경쟁하는 임시정부도 해적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다. 매개는 ‘떡고물’이다. 몸값이 지불되면 해적 행동대원이 챙기는 건 30%. 나머지는 두바이 등지에 거주하는 투자자와 부족 장로, 씨족 지도자, 지방관료 등이 나눠 갖는다. 이 돈은 다시 기부금 형태로 중앙 정계에까지 전달됐다. 해적을 상 위에 올려놓고 벌이는 돈잔치인 셈이다.
해적의 탄생
1994년 3월, 서른두 살의 이탈리아 여기자 일라리아 알피는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 시내에서 총격을 받고 목숨을 잃었다. 알피는 근거리에서 뒤통수를 저격당한 듯 보였다. 무작위 강도가 아니라 정확히 겨냥한 처형 같은 모양새. 부검 보고서는 감쪽같이 사라졌다.
몇 년 후 한 환경운동가는 알피가 죽던 날 이탈리아와의 불법 거래를 알선한 소말리아 씨족 지도자를 인터뷰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무기를 들여오는 대가로 이탈리아의 독성 폐기물을 소말리아 앞바다에 버리도록 허용한 뒷거래였다. 감시자 없는 소말리아에서 부국은 고기를 싹쓸이하고 쓰레기를 버렸다. 소말리아의 소규모 어업은 줄줄이 무너졌다. 어부들은 총을 들었다. 해적의 시작이다.
지난 1월 삼호주얼리호를 납치한 해적이 어부였는가, 묻는 건 어리석다. 불법 어로와 쓰레기 투기는 오래 전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다. 소말리아인은 여전히 가난하고, 해적질은 이미 매력적인 벤처사업이 돼 버렸다. 무기 든 군인과 정치인, 이웃나라까지 이해의 실타래는 꼬일 대로 꼬였다. 세계 각국이 보낸 군함은 엉킨 실타래를 풀 수 있을까.
해적 협상가로 활동해온 앤드루 음왕구라는 이렇게 말했다. “총을 들고 가난과 싸울 수는 없습니다. 근본 원인과 싸워야 합니다.” 강혜정 옮김.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