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박현동] 한·미 FTA 논쟁 이제 끝내라
입력 2011-11-09 22:01
“정치인들은 괴담에 기생하지 말고 국익과 글로벌 경제의 큰 틀 및 흐름 직시해야”
며칠 전 일이다. 늦은 밤 학원에서 귀가한 딸아이가 “아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되면 맹장수술하는 데 900만원이 든다는데요”라고 말했다. 두어 달 전 급성맹장수술을 했던 딸아이는 다행이라는 표정이었다. “누가 그런 말을 해?”라고 물었다. “인터넷에서 봤는데 친구들이 다 그렇게 알고 있어요”라고 했다. 낭설이다. 한·미 FTA 13.1조 3항과 부속서Ⅱ는 ‘공공목적의 서비스와 보건의료서비스는 한·미 FTA 협정 대상에서 제외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인터넷에선 한·미 FTA에 반대하면 ‘개념’있는 사람으로 대접받고, 찬성하면 ‘무뇌아’ 취급당한다. 집단린치도 가해진다. FTA 괴담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확산된다. 진원지는 분명치 않다. ‘애국’과 ‘매국’으로 분류하는 정치인도 있다. 괴담은 여론으로 빠르게 둔갑한다. 일부이긴 하나 정치인과 연예인이 괴담에 기생하는 경우도 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2008년 광우병 괴담과 이를 이용했던 일부 정치인과 연예인의 행태가 잘 말해준다.
한·미 FTA를 두고 정치권이 사생결단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홈페이지를 보면 대한민국이 일국이체제(一國二體制)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는 합리적 결론은커녕 논의마저 실종된다. 논점이 변질되면서 매국론도 나오고, 색깔론도 제기된다. 한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괴담 뒤에 숨어서 음모를 꾀한다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 이들에게 과연 국가의 장래를 맡겨도 되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현 시점에서 한·미 FTA가 약(藥)이냐, 독(毒)이냐는 논란은 성급하다. 그 자체가 약과 독을 구분하는 절대가치를 지닌 개념이 아니다. 추구하는 가치에 따라, 시각에 따라, 찬성할 수도 반대할 수도 있다. FTA는 양자협상을 통해 이뤄진다. 상대적이다. 당연히 마냥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 없다. 준비 정도에 따라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윈윈게임이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상대가 약할 때는 양자체제가, 강할 때는 다자체제가 유리하다. 한·미 FTA가 반드시 우리에게 이익이 된다고 할 수 없는 이유다. 반면 투자 규모를 감안하면 필요한 장치다. 2010년 기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직접투자액은 19억7000만 달러인 반면 우리나라의 대미 직접투자액은 49억8000만 달러다.
한·미 FTA가 무조건 좋다거나 또는 나쁘다는 것은 일방적 주장일 뿐이다. 특히 여야가 첨예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는 투자자 국가소송제도(ISD)는 유·불리를 무 자르듯 잘라 말하기 힘들다. 미국이 상대적 강자라는 점에선 불리할 수도 있지만 투자 규모 측면만을 보면 우리에게 무조건 나쁜 제도라고 단정할 수 없다.
한·미 FTA는 또 다른 경제 전쟁터다. 때문에 ‘선의’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더욱이 강자와 약자가 분명할 때 자유무역은 원천적으로 공정하기 어렵다. 한·미 FTA 반대론자들은 이런 사실을 토대로, 구체적으로는 특별법 성격이 강한 ISD 규정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한·미관계의 특수성도 이런 판단에 영향을 미친 듯하다. 틀린 말은 아니나 정답 또한 아니다. 오로지 원시적인 힘이 경제전쟁을 지배한다고 보기 힘들다.
전쟁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요소는 장수의 지략, 첨단 무기, 병사들의 전투력 등이다. 경제전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국가 경제력 외에 개별 상품의 품질, 마케팅력 등도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친다.
좋든 나쁘든 세계경제 질서는 세계무역기구(WTO) 중심의 다자체제에서 FTA 중심의 양자체제로 이동했다. 경제에 국경이 없고, 수출이 우리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점을 인정한다면 FTA 자체를 부인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나라처럼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선 더 그렇다.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의미다. 피할 수 없다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그나마 상책이다. 더 이상의 논쟁은 독이 될 뿐이다.
박현동 편집국 부국장 hd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