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환의 삶과 신앙] 감악산을 걸으며

입력 2011-11-09 18:07


주일 오후 생일맞이 기념등반이라 이름 붙인 나홀로 등반에 나섰다.

파주시 적성면에 자리한 감악산으로. 중턱산악회장인 나에게 해발 675m의 고도는 제법 고난도 산이라 배낭을 준비했다. 배낭 안에 김밥 두 줄, 오이 두 개, 단감 두 개, 생수 두 병, 그리고 남는 자리에는 지난 54년을 슬픈 짓, 미운 짓, 예쁜 짓을 번갈아 하며 나를 따라 다녔던 또 다른 나로 채웠다.

감악산을 선택한 것은 집에서 1시간 거리의 가까운 산이면서 ‘경기 5악’ 중의 하나라는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산이기도 하지만, 특히 그 산이 가지고 있는 임꺽정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다. 16세기 조선 중기, 경기도 양주의 백정 출신 천민으로 삶의 고달픔에 짓눌린 민중들의 아픔에 공감해 그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바치고 처형당한 영웅이라 불린 도둑 임꺽정. 감악산은 홍길동, 장길산 등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의적 영웅 임꺽정을 키운 산이라 한다. 험한 감악산을 뛰어다니며(그는 이 산을 구름에 달 가듯 축지법으로 돌아다녔다 한다) 장차 의적이 되어 눈에 핏발 선 민중들의 아픔을 구체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삶의 목표를 세우고 다진 산. 그 산자락 마디마디 굽이굽이마다에 의적 임꺽정의 고함소리, 한숨소리, 호탕한 웃음소리의 발자국들이 남아 있는 듯하다.

영웅의 산을 무거운 몸으로 걸으며 내내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을 생각했다. “자신의 천복을 좇는 자가 영웅이다” “가슴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따르는 자가 천복을 좇는 자이고 삶의 영웅들”이라는 캠벨의 가르침이 임꺽정의 호탕한 웃음 자취와 어우러져 감악산의 늦가을 정취를 신비스럽게 했다.

오색으로 물든 아름다운 감악산의 능선길을 걸으며 나는 물었다. 나는 지금 내 가슴의 소리를 듣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떤 춤을 추고 있을까? 가슴에서 들리는 소리를 따라 추는 춤? 아니면 의무적으로 추어야만 하는 억지춤? 엉거주춤? 막춤? 내가 걷고 있는 길은 어느 숲일까? 자신만의 숲? 아니면 단테와 코엘료가 자신을 잃어버렸다던 혼돈의 숲?

이런 생각들과 함께 감악산을 오르다 보니 내 배낭속의 또 다른 내가 한없이 무거워지기도 하고 미워지기도 하고, 안타까워지기도 했다.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던 슬픈 짓, 예쁜 짓, 그리고 가끔씩의 미운 짓으로 나를 따라다녔던 또 다른 나. 이제 이것들과 작별하고 싶었다. 이 깊은 감악산 골짜기에 그놈들을 살짝 내려놓고 가볍게 뒤돌아서서 내려오고 싶었다. 어느 골짜기에 이놈들을 잘 버려 놓지? 임꺽정이 숨어 지냈다는 임꺽정 굴속이면 어떨까? 포졸들도 찾아내지 못했다니 아마 아무도 그 깊은 굴속은 찾지 못할 것이고 그 굴속에 갇힌 놈들도 출구를 찾아내지 못할 걸? 내가 오늘 절묘한 산행길을 선택하여 드디어 54년 묵은 숙제를 풀 수 있겠구나.

이런 고민을 하며 감악산 정상에 다다랐는데 보이는 푯말, ‘등산객 여러분! 가져오신 짐은 산에 버리지 마시고 잘 싸서 집으로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그래, 맞다. 내가 내려놓는다고 그놈들이 나를 다시 찾아내지 못할까? 나보다 먼저 내 길 위에 서서 나를 기다릴 녀석들이다. 차라리 그놈들과 더불어, 그놈들을 잘 어르고 달래고 훈련시켜 다시 추는 나의 춤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이 나를 기다려주시듯, 참고 기다리다 보면, 열심히 기도하여 내 혼을 가볍게 하고, 지금 깨어나고 있는 뜨거운 마음으로 육신을 단련하다 보면 그놈들도 언젠가 철들 날 있겠지. 그래, 하늘이 내게 주신 내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야지. 슬픈 놈, 미운 놈, 예쁜 놈들과 함께. 그놈들과 함께 이 길을 걸으며 내 마지막 춤을 추며 살아가야지.

■ 정석환 교수는 이야기심리학을 통해 보는 성인 발달과 목회상담 분야의 전문가입니다. 현재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장 겸 연합신학대학원장을 맡고 있습니다.

정석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