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의 시편] 조용한 파문, 거룩한 개혁

입력 2011-10-31 17:56


과테말라는 한때 스페인의 점령지였다. 그런데 거기에 중세 때부터 엄격한 규율을 전통으로 하는 가톨릭 수도원이 있었는데 몇 년 전 그곳을 방문하여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곳은 높은 담을 중심으로 남자와 여자 수도원이 나누어져 있었고 절대로 서로 들어갈 수 없었다. 다만 1년에 딱 한번 남자 수도사들이 여자 수도원에 들어가 강의를 한다. 그런데 남자 수도사들이 강의를 하고 가면 몇 달 후에 배가 불러오는 수녀들이 생기는 게 아닌가. 당시 수녀가 임신을 하면 사형을 시켰고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까지도 함께 사형시켰다. 양다리와 양손을 밧줄로 묶어 놓고 위에서 소금물을 머리와 이마에 붓고 물고문으로 죽였다. 이렇게 참혹한 규칙을 철저히 지키는 것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지역에 지진이 나 땅이 갈라지면서 파묻힌 수녀들의 몸속에 아이가 있었던 흔적이 발견되고 일기가 발견되면서 그 비밀이 드러났다. 지진이 아니었더라면 수도원의 비밀은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이것은 지금까지 가톨릭의 관습이 되고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그래서 부정적이고 어두운 일들은 결코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어떻게든지 내부에서 개혁하고 자정능력을 갖고 정화하려 한다. 그들은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보다는 이미지 관리에 더 비중을 둔다.

그러나 개신교는 어떤가? 대부분 내부고발로 인해 교회의 치부가 바깥으로 공개된다. 개혁이라는 명분으로 파괴적 폭로와 법적 고발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교회 안에서 해결할 문제를 외부로 드러내고 언론에 제보할 뿐 아니라 서슴없이 사회 법정까지 끌고 간다. 그런 면에서 내부고발은 정말 큰 문제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 성과 제국의 멸망도 내적 분열과 고발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서로마 제국뿐 아니라 동로마제국, 러시아도 마찬가지였다. 회사도 그렇지 않은가. 직원들이 분열하고 회사 내의 문제를 외부로 들추어내다가 이미지가 실추되고 결국 문을 닫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교회는 어떤가. 교회 안의 문제가 내부고발로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이미지가 땅바닥까지 추락했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는 자칭 루터와 칼뱅(?)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겉으로는 윤리와 도덕, 개혁이라는 가면으로 포장하지만 내면은 바벨탑의 욕망이 아닌지 점검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다원주의 물결 속에서 타 종교의 도전, 이단과 안티세력들의 공격에 대해 힘을 합쳐 대응한다 해도 감당하기 힘든 지경이다. 그런데 내부 분열로 치부를 스스로 드러내는 것은 설사 개인적 목적과 이득을 얻는 데 성공했다 해도 결국 공멸을 자초하게 된다. 진정한 개혁자인 루터와 칼뱅처럼 되고 싶다면 나부터 먼저 개혁하고 회개해야 한다. 내 안에서부터의 통절한 회개가 필요하다. 그럴 때 거룩한 파도가 일어나 참다운 갱신이 가능케 된다. 아니, 그럴 용기마저 없다면 중세 수도원이 비밀을 지키려 했던 ‘그것’이라도 배울 용의가 없는지 되묻고 싶다.

(용인 새에덴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