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12) 손님 7만5000명에 음식 대접한 아내 요리코
입력 2011-10-31 17:54
나에겐 고난도 있었지만 감사한 일이 훨씬 많았다. 좋은 부모님으로부터 좋은 신앙과 사회적 실천을 전수받은 것, 한국 친구를 통해 한국을 알고 사랑하게 된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아내 요리코를 만난 것이다. 요리코가 없었다면 청계천 빈민운동이나 지금의 사역도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내는 어느 누구보다도 내 사역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다. 아내는 다른 사람의 나쁜 점은 결코 말하지 않았다. 어떠한 문제 앞에서도 흔들리는 법 없이 항상 긍정적이었다. 아내가 가진 내면의 힘은 나보다 훨씬 강했다.
요리코는 지금까지 1973년과 75년, 2006년, 2010년 모두 네 번 한국을 방문했다. 그녀는 어떤 상대든지 따뜻하게 맞았다. 비판하거나 편견이 일체 없었다. 그러면서도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것에 대해서는 분개해했다. 내 인생이 이렇게 풍요로울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아내 요리코 때문이다. 그녀의 포용력 때문에 나 역시 다양한 한국 사람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포용력을 갖게 됐다. 지금 나는 빚도 없고 저금한 것도 없지만 매일매일 감사하고 행복하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소개해주신 아내 때문이다. 아내의 지원과 기도가 있었기에 자유롭게 한국을 드나들 수 있었고, 피곤한 몸과 마음이 쉴 수 있었다.
요리코는 1933년 4월 16일 태어났다.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초등학교 때 교회에서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하고 난 뒤 점령군 대장이었던 맥아더의 요청으로 2000명의 미국 선교사들이 일본에 왔다. 나는 그때 학생으로서 그 선교사를 도와 집집마다 교회를 홍보하는 전단지를 돌렸다. 그때 요리코의 가정을 방문하게 됐다. 요리코도 교회에 나왔고,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서로를 알게 됐다. 요리코는 어릴 적부터 인내심이 많고 조용하고 순종적인 여자였다. 나의 미국 유학 기간인 11년을 한결같이 기다려준 그런 여자였다.
그녀는 요리에 재주가 많았다. 어렴풋이 계산해보니 지금까지 우리 집에 온 손님 7만5000명에게 그녀가 손수 음식을 만들어 대접했다. 내가 비올라대학에 있을 때 도쿄의 요리학교에 다닐 것을 권유했고, 아내는 곧이곧대로 내 말을 따랐다. 그 뒤로 그녀는 어느 누가 우리 집을 방문하더라도, 또 아무리 돈이 없더라도 우리 형편에 맞게 손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녀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침착하고 긍정적이었다. 내가 일본과 한국에서 사역할 때도 결코 원망의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비록 우리가 가난할지라도 그녀는 전심으로 내가 하는 일을 도왔다. 그러면서도 아내는 그런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게 뭐가 이상한가’라는 반응이다. 남편이 바늘이고 아내는 재봉실이니까 남편이 하는 일을 따르는 게 뭐가 대수냐는 것이다. 내가 하는 것보다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자 했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졌을 때 도쿄의 많은 초등학생들이 지방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일종의 피난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나도 그때 지금 살고 있는 야마나시현으로 강제 이주 조치됐다. 야마나시현은 쌀 생산이 적은 고장이었다. 당연히 굶는 날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어느 농가의 젊은 부부가 자기 집 그늘에서 주먹밥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이런 경험들을 통해 나와 요리코의 마음속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싹텄던 것 같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