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용 장난감? 부끄럽고요∼ ‘정통’ 악기입니다
입력 2011-10-27 18:18
궁중에 악사들이 악기를 들고 들어온다. 악기를 본 왕자가 신하에게 연주를 권한다. “거짓말처럼 쉬워, 손가락과 엄지로 구멍을 막고 입으로 숨을 불어넣으면 가장 감명 깊은 음악을 들려줄 거야.” 이어지는 한마디. “이 조그만 악기 속에는 많은 음악이, 빼어난 소리가 들어 있어.”
셰익스피어의 1601년 작품 ‘햄릿’ 중 3막2장의 내용이다. 여기서 왕자는 햄릿이고, ‘가장 감명 깊은 음악을 들려줄 악기’는 바로 리코더다. 햄릿은 리코더의 옛 위상을 보여주는 좋은 사료다. 그 시대엔 리코더 악사들이 궁중에 드나들었고, 햄릿 왕자도 리코더를 연주할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 리코더의 위상은 형편없다. 초등학교에서 교육용으로 배우는 악기인 탓에 악기점이 아닌 학교 앞 문방구에서 구할 수 있고, 그래서 어린이용 장난감 취급을 받기도 한다. 트럼펫처럼 소리 내기 어려운 관악기들과 달리 특별한 기술 없이도 음을 낼 수 있다는 장점은 오히려 ‘애들이나 부는 쉬운 악기’라는 나쁜 인식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리코더는 유구한 역사가 있고 제대로 된 소리를 내려면 상당한 연습이 필요한, 프로 음악가들이 전문적으로 연주하는 ‘진짜 악기’다. 국민 모두가 이름과 생김새를 알지만 정작 악기로서의 매력은 감춰진 리코더. 이 기사는 ‘초딩용 악기’ 오명을 쓰고 있는 리코더의 명예 회복을 위한 것이다.
10세기 무덤서 발견
리코더의 역사는 무척 길다. 문헌상으로는 10세기 무덤에서 리코더가 발견됐다는 내용이 있다. 이 시기를 기준으로 하면 역사가 무려 1000년이 넘는다. 14∼16세기 르네상스 시대가 되면서 나무로 제작하는 방식이 정착됐다.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은 기악보다는 성악 중심이었지만, 리코더는 크기에 따라 여러 성부를 표현할 수 있는 특징이 있어 성악중심 시대에도 중요한 악기로 대접받았다.
전성기는 바흐로 대표되는 바로크 시대다. 귀족층을 위한 실내악이 절정을 이뤘던 시절, 이 악기는 실내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바흐와 헨델, 비발디 등 이 시대 대표 작곡가들이 리코더를 위한 고난도 독주곡을 많이 만들었다.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4번에 등장하는 플루트 부분도 원래는 리코더 솔로였다.
하지만 바로크 시대가 저물면서 리코더의 지위는 급격히 추락한다. 실내악이 쇠퇴하고, 공연장에 모인 대중을 만족시키기 위한 음악이 유행하면서 악기의 소리를 크게 만드는 등의 악기 개량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하지만 리코더 제작자들은 전 시대의 확고부동한 지위에 안주, 악기 개량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 탓에 리코더는 플루트, 클라리넷 등 소리가 크고 분명한 악기들에 밀려나고 만다. 20세기 초 르네상스 시대 음악이 재조명 받을 때에 이르러서야 리코더가 다시 대중에게 친숙한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서구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이 악기는 한국에 1963년 교육용으로 도입됐다. 악기는 소개됐는데 정작 국내엔 전문 연주자가 한 명도 없었다. 공연장이 아닌 학교에서만 쓰이면서 자연스럽게 ‘어린이 악기’라는 인식이 생겼다. 게다가 값싼 플라스틱 리코더가 보급되면서 ‘싸구려’라는 선입견까지 더해졌고 불행히도 지금까지 이 인식은 변하지 않고 있다.
제작기간 한 달, 예민한 악기
춘천 서면의 한 공방. 10평 남짓한 건물에 선반 등 공작기계가 들어있고, 바닥엔 톱밥이 가득하다. 한 구석에는 리코더 십 수 자루가 받침대에 놓여있다. 이곳은 국내 유일의 수제 리코더 공방이고, 조진희(50)씨는 유일한 리코더 제작 장인이다. 그는 리코더 전문 연주단 ‘블록플뢰텐 서울’의 음악감독이면서 한국예술종합학교 등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플라스틱 리코더는 공장에서 금방 찍어낼 수 있지만, 나무 리코더는 제작과정이 꽤 길고 복잡하다. 원목을 원통모양으로 깎고, 내부 구멍을 뚫는 등 형태를 만드는 기초 작업을 한 뒤 아마기름에 48시간 담가둔다. 늘 사람의 침과 접촉하는 악기다. 기름에 담가둬야 침으로 인한 손상을 막을 수 있고, 소리도 좋아진다. 기름에서 꺼내 2주간 건조기간을 거친 뒤 입술이 닿는 부분인 ‘윈드 웨이’와, 소리가 나는 부분인 ‘라비움’을 직접 만든 공구로 섬세하게 깎아내고 다듬는 과정을 반복한다. 완성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약 한 달.
재료로는 회향목, 흑단과 단풍나무 등이 주로 쓰인다. 회향목은 소리가 부드러우면서도 맑아 전문 연주자들이 가장 선호한다. 흑단은 전달력이 좋은 대신 소리가 날카롭다는 단점이 있다. 조씨는 해외 제작자들은 쓰지 않는 대추나무도 사용한다. “대추나무는 연주자의 호흡을 잘 받아줍니다. 세게 불 때도, 약하게 불 때도 컨트롤이 잘 되죠.” 리코더의 약점인 작은 소리를 보완하기 위해 리코더 헤드와 바디 이음새 부분에 옥이나 상아로 덧대기도 한다. “이음새에 단단한 물질을 대면 소리 전달력이 더 좋아져요.” 옥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그만 쓰는 재료다.
수제는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든 만큼 무척 비싸다. 최소 100만원, 비싼 것은 300만원이 넘는다. 게다가 민감한 녀석이라 어린 아기 다루듯 매우 곱게 취급해야 한다. 하루 1시간 정도 불면 그날은 더 연주해선 안 된다. 침 때문에 악기가 망가질 수 있다. 겨울철 뜨거운 방바닥에 그냥 팽개쳐뒀다간 아예 못쓰게 된다.
그나저나 이렇게 비싼 것을 누가 삽니까? 조씨는 매년 1월 열리는 오스트리아 빈 악기박람회에 지난해부터 참여하고 있다. “박람회에 온 동양인은 저뿐이더군요. 서양인들로선 리코더 파는 동양인이 이상했겠죠. 만약 외국인이 대금을 만들어서 판다면 우리나라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지난해는 허탕 쳤지만, 올해는 박람회를 통해 유럽사람들에게 꽤 팔았다. “처음엔 현지인들이 못 믿었겠지만 2년 연속 오니까, 소리도 좋아서 사간 것 같아요.” 유럽의 한 교수는 옥을 덧댄 320만원짜리 리코더를 구입했는데 소리가 부드러우면서도 힘차다면서 매우 만족했다고 한다. 국내에선 30명 안팎인 프로 연주자들이 고객이다.
연주자가 장인이 되기까지
그는 원래 리코더 연주자였다. 어릴 때부터 리코더 소리를 좋아했다. “초딩 악기를 공부한다고 유학까지 가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빈에 가서 공부했다. 자신이 리코더 유학을 떠난 두 번째 한국 사람이란다.
1994년 귀국한 뒤 잘못된 리코더 인식을 바꾸는 데 온 노력을 기울였다. 세미나와 강의를 열고 리코더 연주 앨범도 냈다. 90년대 말부터 바로크 시대를 복원, 그 시대 악기로 연주하는 ‘고(古)음악’이 유행하면서 리코더를 활용하는 연주회가 생겨났고, 2002년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 리코더 전공이 개설되면서 그의 활동폭도 조금씩 늘어갔다. 하지만 2003년 느닷없이 오른쪽 귀에 난청이 찾아왔다. 청각은 음악가의 생명. 연주활동을 계속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를 지배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죠. 치료도 잘 안됐고.”
좌절과 방황의 시절, 일본의 리코더 장인인 야마오카 시게하루를 만나 그의 집에서 며칠씩 묵으면서 리코더 제작 기술을 배웠고 결국 장인의 길로 들어섰다. “전화위복이 된 것 같아요. 그 계기로 악기 제작을 안 했다면 아직도 한국엔 리코더 제작자가 한 명도 없었겠죠.” 제작에 몰입하다 보면 난청, 이명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제작 일이 손에 익으면서 한동안 소홀했던 연주활동에도 의욕이 생겼다.
공방 초창기엔 웃지 못할 사건도 많았다. 처음엔 나무를 원목 상태로 주문을 했다. 그 탓에 세관, 검역소 등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원목을 쌓아놨더니 장모님이 장작인 줄 알고선 불에 땐 적도 있단다.
귀는 지금도 좋지 않다. “오른쪽으로 못 들어요. 이명도 있고 불편하죠.” 하지만 오랜 시간 한쪽 귀로 연습한 덕분에 다행히도 악기 제작이나 음악감독 일을 하는 데 문제는 없단다.
리코더 연주의 핵심
조씨가 꼽는 리코더의 최대 매력은 꾸밈없고 순수한 소리다. “리드(숨을 불어넣는 나무관)를 쓰는 다른 관악기와는 달리 리코더는 사람의 숨결 그대로를 소리로 표현해줍니다.” 한예종에서 리코더를 전공하는 이유나(20)씨도 “맑고 따뜻하면서도 순수한 소리를 내는 것이 리코더만의 큰 장점”이라고 말했다.
이제 리코더가 조금이나마 달라 보이는가? 혹시라도 연주해보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호흡’에 유의해야 한다. 좋은 소리를 내려면 많은 연습이 기본이지만, 호흡에 집중한다면 좀더 멋들어진 연주가 가능하다.
리코더 호흡의 핵심은 ‘두두두’다. 바람을 불어넣는답시고 그저 ‘후후후’하는 게 아니라 혀끝을 윗니 안쪽에 닿았다가 떨어지게 한다는 느낌으로 ‘두두두’ 혹은 ‘투투투’를 발음하며 바람을 불어넣으면 선명한 소리가 난다. 이것만 잘해도 ‘빽빽’거리는 소리는 안 난다.
능숙한 연주자가 늘수록 리코더의 명예회복 시간도 빨라질 터. 다루기 쉬운 악기인데다 어린 시절 옛 추억도 떠올릴 수 있으니 이번 주말 연주에 도전해 보시길.
김도훈 기자 kinch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