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9) 1970년대 군사독재 시절…그리고 불편한 진실들
입력 2011-10-26 19:10
1970년대 당시 나는 한국의 민주화운동 인사들과도 꽤 친분이 두터워져 있었다. 청계천 빈민운동에 관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만나고 교제하게 됐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일부 진보 성향 목회자들은 신촌의 술집에 갈 때 꼭 나를 데려갔다. 내가 항상 돈을 냈기 때문이다. 식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어도 계산은 거의 내가 했다. 아마 당시 한국은 가난했고 일본은 잘 살았으니까 한국 사람들 생각에 내가 돈이 많을 거라고 여겼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그런 부담을 마다하지 않고 감당했다.
그런데 이들은 술을 마시고, 여자 옷 속에 손을 넣는 등 목사가 아닌 사람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술집에서 놀았다. 처음엔 ‘민주화운동을 하느라 아주 긴장해 있으니까 그렇겠지’라고 이해했지만 그 후 몇 차례 그런 장면을 보면서 굉장히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민주화운동을 한다고 다 깨끗한 사람들은 아니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문제는 안기부 요원들에 의해 그런 장면들이 사진에 찍히고, 결국 민주화운동은 물론 생활에도 커다란 족쇄가 되고 만다는 것이다. 당시 H씨도 안기부 요원들이 쳐놓은 그 그물에 걸려 사진이 찍히는 일이 발생했다. 이후 H씨는 정부에 대해 큰소리를 내지 못했다.
술집의 여자들은 주로 20대 초중반으로 보였다. 주고받는 얘기를 들어보니 그중에는 전라도, 강원도, 심지어 제주도에서 왔다는 이도 있었다. 나는 술도 마실 줄 몰랐고, 더군다나 여자를 데리고 노는 법도 몰랐다. 그중 한 여자에게 서툰 한국어로 고향이 어디이고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그 여자의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자신의 고향과 할머니가 있다는 얘기까지 소상히 들려줬다. 뭐가 갖고 싶은지 물어봤다. 그랬더니 신발, 옷, 크림(로션)을 갖고 싶다고 했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하고 다음에 일본에 갔다 올 때 그 물건들을 사서 다시 신촌 술집에서 그 여자를 만나 전해줬다. 그 여자는 무척 기뻐했다. 나는 한국어가 서툴었기에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었다. 다만 ‘하나님이 살아계시니까 반드시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라. 그리고 하루빨리 이 직업을 버리고 보람 있는 일을 하라’고 말해줬다.
내가 매춘부 여성들을 노리개로 생각하지 않고 그렇게 대할 수 있었던 데는 청계천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청계천은 지옥이라고 말했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옥과 같은 그곳에도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고, 희망이 있고, 오순도순 서로 돕고 살아가는 정이 있었다. 나는 그것이 천국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나는 당시 서울의 대형 교회에 다니면서 예배를 드려봤고, 빌리 그레이엄 집회에도 참석했었다. 물론 그곳도 천국의 한 모형이다. 하지만 청계천이야말로 내게는 가장 훌륭한 천국의 모형이었다. 그것은 매춘부, 깡패들마저 위대한 천국 시민들로 보게 했다.
교회는 건물이 전부가 아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서로 안아주고 도와준다면 그 가운데 예수님은 계신 것이다. 바로 그때 예수님의 사랑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로 흘러가게 돼 있다. 큰소리로 외치지 않아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듣고 보고 알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청계천에서 본 교회, 청계천에서 목격한 천국의 모형이다. 천국의 지상(地上) 샘플이 바로 청계천이었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