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흥우] ‘계륵’ 5·24조치

입력 2011-10-24 17:32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 기조는 ‘비핵개방 3000’이다. 북이 비핵화를 이행하고 외부세계에 문을 열면 1인당 국민소득 3000달러가 되도록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비핵개방 3000은 ‘햇볕’에 길든 북의 철저한 외면으로 정부 출범 이후 줄곧 구호로만 존재해 왔다. 그마저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도발을 겪으면서 사문화됐다.

‘당근’은 금기어가 됐고 ‘채찍’의 시대가 도래했다. 정부는 국민의 방북을 불허하고 대북 신규투자 및 사업투자 확대를 금지했다. 인도적 사업을 제외한 대북 지원을 끊었고, 북한 선박이 우리 해역을 운항하지 못하도록 했다. 5·24 대북조치다.

이는 비핵개방 3000을 대체한 대북정책의 새 가이드라인이 됐다. 그로부터 1년5개월이 흘렀다. 그 결과 우리 의도와 달리 대중국 의존도만 높여주고 말았다. 엉킬 대로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한 남북 비밀접촉도 있었지만 북의 어깃장으로 앙금만 남긴 채 무위로 끝났다.

내년 총선과 대통령선거를 의식한 한나라당 내에서 남북관계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졌고,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확산됐다. 여당의 요구가 통했는지 통일부 장관이 매파에서 비둘기파로 바뀌었다. 일단 분위기는 좋다.

북의 태도가 달라졌다. 사흘이 멀다 하고 온갖 선전선동 수단을 통해 “남북관계를 파탄 낸 장본인” “역사의 심판대에 매달아야 할 민족반역자”라며 악담과 저주를 퍼부었던 현인택 전임 장관의 경우와 달리 류우익 장관에 대해서는 일절 비난을 하지 않고 있다. 그의 대북 유화 제스처가 효과를 보고 있다는 증거다.

장관 지명 이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닌 ‘유연성’은 류 장관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얼마 전 참석한 한 모임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류연성’으로 불러 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어떻게든 남북 교착상태를 풀어보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대북정책 기조는 일관되게 유지하되 그 속에서 유연성을 찾겠다”고 했다. 풀기 고약한 숙제다. 유연성을 발휘하면 5·24 조치의 근간이 흔들리고, 대북정책 기조를 유지하면 유연성을 발휘할 공간이 없어지는 건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도 그는 세상의 어떤 창도 막을 수 있는 방패와 세상의 어떤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을 동시에 만들어야 하는, 모순의 문제를 풀겠다고 나섰다.

정부는 천안함 도발 등에 대한 북의 사과 없이는 5·24 조치 해제는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7대 종단 대표와 지휘자 정명훈씨 등의 평양 방문을 허용했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개성공단을 방문했다. 이 모두 국민의 방북을 불허한 5·24 조치 위반이다. 남북 경색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5·24 조치 완화가 불가피하다는 현실을 정부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정부의 방침이 유연성 확대에 있다면 대규모 지원을 수반하지 않는 비정치 분야의 남북교류와 접촉을 대폭 확대할 필요가 있다. 이희호 여사 방북 건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종교, 문화계 인사의 교류 물꼬를 튼 마당에 인도적 목적의 이 여사 방북을 거부할 명분은 약하다. 정부의 호오(好惡)에 따라 방북을 선별적으로 허용하면서 유연성 운운하는 것은 자기 최면에 불과하다.

5·24 조치 가운데 실질적으로 북에 타격을 줄 조항은 ‘우리 해역에서의 북한 선박 운항금지’ 한 가지뿐이다. 나머지는 우리 측도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경제적 측면으로만 따지면 북측에 비해 우리 측 손해가 더 클 수 있다. 이런 불합리를 방치하는 것은 류 장관이 강조하는 실용주의와도 배치된다.

이흥우 정치부 선임기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