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규의 새롭게 읽는 한국교회사] (34) 일제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2

입력 2011-10-23 17:47


1%의 기독신자, 3·1독립운동 선봉에 서다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쓴 함석헌은 이렇게 물었다.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무언가를 가지고 간다고 말할 때 우리 민족이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러면서 ‘그것은 아마도 가난과 고난일 것’이라고 했다. 우리 민족의 역사는 가난과 고난의 역사였다. 그 역사의 고비마다 한국교회는 그 중심에서 민족의 문제를 신앙의 지평에서 수용했다. 때로 한국교회는 충군애국의 종교로, 때로는 반일순국(反日殉國)의 종교로 민족의 고난을 양 어깨에 짊어지고 앞장서 걸어갔다. 그 한 가지 예가 기독교의 3·1운동에의 관여였다.

3·1운동이란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과 태화관, 전국의 9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하면서 시작되어 협의적으로는 약 2개월, 광의적으로는 1년여에 걸쳐 해외의 만주, 연해주 등으로 확대된 항일독립운동을 의미한다. 이 운동은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지 9년 후에 일어난 사건으로서 민족독립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소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때 2개월에 걸쳐 200만이 넘는 한국인이 3·1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전국 232개 부, 군 가운데 229개 부, 군에서 1491건의 시위를 벌였다. 4월 말에 접어들면서 일제의 야만적인 탄압으로 반일 투쟁은 서서히 막을 내렸다. 3월 1일에서 5월 말까지 학살된 사람이 7979명, 부상자가 1만5961명, 검거된 사람이 4만6948명에 달했다. 이것은 일제가 만든 통계이므로 실제 희생자는 이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3·1독립운동에서의 역할·영향

3·1운동 당시 한국 인구는 200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기독교인은 20만명에 달했다. 3·1독립운동에 가담한 인구가 200만명이었으므로 전체 인구의 10%가 3·1운동에 가담한 셈이다. 특히 기독교는 3·1운동의 준비단계에서 선언문 배포와 군중 동원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일제침략하 한국 36년사’에서는 3·1독립운동 참가자의 종교별 통계를 제시하는데, 개신교가 22%, 천도교가 15%, 기타 종교가 2%, 무종교가 61%다. 이 당시 기독교 인구가 전 국민의 1%에 지나지 않았는데, 3·1운동 참가자 중 22%가 개신교신자였다는 점은 기독교 신자들이 이 운동을 주도했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에서 기독교계의 역할과 영향이 컸기 때문에 교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 또한 심했다. 조선총독부가 1919년 5월에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1919년 4월 말까지 투옥된 기독교인은 2120명으로서 유교, 불교, 천도교도의 총수 1556명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또 1919년 9월 장로교 총회에 보고된 자료에 의하면 체포된 신자가 3804명, 체포된 목사·장로는 134명, 기독교 관련 지도자는 202명이었다. 미국 기독교연합회 동양문제연구회가 펴낸 ‘한국의 상황(The Korean Situation)’에 의하면 1919년 3월 1일부터 7월 20일까지 631명이 피살되었고 2만8934명이 체포되었다.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평가에는 이견이 없지 않으나 이들이 운동세력의 조직화, 자금 제공, 독립선언서 작성과 배포 등 3·1운동을 선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33인의 종교적 분포를 보면, 천도교도 15명, 불교도는 2명에 불과했으나 기독교 신자는 16명에 달해 전체의 절반에 해당하며, 33인을 포함하여 48인 대표로 볼 때 기독교 대표는 24인으로 이 경우도 절반에 해당한다.

3·1운동, 한국교회를 바꾸다

위의 33인에 포함되지 않는 기독교 지도자 가운데 당시 총회장이던 김선두 목사가 평양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는 등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신학교는 잠정 휴교했다. 감리교의 경우 26명의 남감리회 소속 목사들이 제명 혹은 휴직당하고, 17명의 연회원들이 투옥됨으로써 “지방회를 감옥에서 개최하면 좋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이 당시 기독교 내부에서는 정치적인 문제에 교회나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에 대한 이견이 없지 않았다. 이런 문제로 고심했던 한 사람이 감리교 목사 신석구였다. 그해 2월 20일쯤 오화영으로부터 독립운동 참여 권고를 받은 그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가 하는 문제로 기도하던 중 2월 27일 새벽에 ‘4000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내 대(代)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되찾는 일에 힘쓰지 아니하면 이는 더 큰 죄가 아니냐’는 음성을 듣고 3·1운동 참여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고 한다. 105인 사건으로 옥고 중 기독교로 개종하고 장로가 된 이승훈도 이와 비슷한 인식에서 독립운동에의 참여를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했다.

3·1운동은 근대 한국역사상 최대의 민족운동이자 독립운동이었고, 한국교회에도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3·1운동을 통해 기독교는 그간의 2가지 오해, 곧 기독교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요, 멸기난상(滅紀亂常)의 종교라는 점과, 둘째 기독교는 외래종교요 서양종교로서 한국인의 신앙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오해를 불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3·1운동은 기독교의 애국적·민족적 기여를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중국 공산당 운동의 대부 진독수(陳獨秀)는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의 역할을 알게 된 후 종교를 미신이라고 생각하던 기존의 입장을 버리고, “조선의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았다는 사실을 볼 때 기독교를 경시하던 사상을 고쳐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국 기독교는 민족 고난의 현장에서 민족과 함께하는 고난 받는 교회였다.

<고신대 교수, 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