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지내십니까?] 송 자 전 연세대학교 총장 “말년은 봉사에 올인… 난 크리스천이니까”
입력 2011-10-19 09:56
“맡고 있는 게 대교그룹 사외이사, 명지학원 이사장, 연세대 숭실대 재단이사, 월드비전 국제이사,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세이프키즈코리아 공동대표, 아이들과미래 이사장,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 아, 푸른이보육원 이사장. 거긴 대교랑 하나은행이 함께하는 거예요. 보육시설이 필요하다고 국내 기업체 10개 정도 동원해서 한 50개 만들려고 했는데 그게 잘 안 됐어요.”
만남을 미루자고 했을 때 송자(75) 전 연세대 총장의 비서는 “다음 달까지 일정이 꽉 찼다”며 난색을 표했다. 간신히 하루 낮이 빈 것을 찾아냈다. 서울 봉천동 대교빌딩에서 만난 송 전 총장의 첫마디는 “나 같은 사람이 무슨 도움이 되겠나”였다. 대화가 진행될수록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말년은 봉사에 올인(다 걸기)하기로 한 겁니까.
“내가 기독교인이에요. 예수님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하셨잖아요. 저도 그렇게 살려고 해요. 사람이 끝을 깨끗이 잘 맺어야 하니까.”
그는 서울 아현중앙감리교회 은퇴 장로다. 연대 재학 시절부터 한 교회를 다녔다.
-이젠 힘들지 않습니까.
“나이를 먹으니까 솔직히 요새는 건강에 신경을 조금 써요. 오전 5시 반에 일어나면 헬스클럽 가서 한 30분 운동해요. 연대 총장 할 때는 바빠서 운동할 시간이 없었어요. 목욕이나 하면 다행이었지. 그땐 특별히 운동하는 거 없어도 발에 땀이 마르지 않을 정도로 뛰어다녀야만 했어요.”
-교육사업을 평생 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했잖아. 하나 못한 게 고등학교 교장이에요. 두 가지 때문에 안 되겠더라고. 우선 내 나이가 교장 하긴 부적절한 것 같아요. 두 번째는 우리나라 교육 시스템이 내 뜻을 펼칠 수 있게 돼 있지 않아. 교장이 자율적으로 일할 분위기가 안 돼 있다고. 거의 지시사항만 따르는 거야.”
-이 정부가 학교에 자율권 주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까.
“미안하지만, 시작하기 전에는 그렇게 얘기했지만 실제론 한 게 별로 없어. 사립학교법 하나도 개정 못했잖아. 학교에 선택권이 별로 주어져 있지 않아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발전이 되겠어?”
그는 1936년 충남 대덕군 진잠면(현재 대전 유성구)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면장을 했다. 7남 1녀 중 둘째인 송 전 총장이 고2 때 한국전쟁이 터졌다. 피란민이 내려오면서 집 근처에 교회가 생겼다. 부모는 “저 사람들 노래 부르는 데 한번 가 보라”며 시각장애인인 셋째 아들을 보냈다.
“걔한테 성경 읽어주고 찬송가도 불러주면서 내가 알아야 도와주겠더라고. 이왕 하려면 제대로 해야겠다 싶어서 내가 다니던 대전고 인근 남부교회를 개척 첫날부터 친구랑 나가기 시작했어. 신앙이 있어서 시작한 게 아닌데 나중에 불이 붙었지. 친구 대여섯 명이 같이 다녔는데 ‘우리 다 목사 되자’ 그랬다고. 지금 한 친구는 그 교회 원로 장로고, 세 친구가 목사가 됐어.”
-송 전 총장은 왜 목사가 안 됐습니까.
“집에서 ‘신학 하려면 공부를 한 번 더 하고 하라’고 했어요. 그러면 난 기독교 대학 간다고 연대를 간 거지. 초등학생 땐 막연히 의사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큰아버지가 ‘너는 의사가 되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거든. 중학교 갈 때 신체검사 받는데 색맹이더라고.”
-대학은 왜 상과(商科)로 갔습니까.
“큰아버지가 연대 가려면 상과 가라고 하셨어요. 또 우리 목사님이 일본서 공부하신 분이었는데 일본엔 경제학을 공부하고 목사 된 사람이 많았다면서 ‘그거 한번 해 봐라’ 그러셨어요.”
59년 대학을 졸업한 그는 미국 워싱턴대에서 경영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 경영학 교수 양성을 위해 미국이 돈을 댔다. 국내 대학엔 경영학과가 없었다.
“유학 시절이 일생에서 가장 힘들었어요. 음식 안 맞지, 말도 못 하지, 들리지도 않지. 낙제하면 김포 비행장에 어떻게 내리느냔 말이야. 그 스트레스가 대단했어요.”
외국인 학생 위로 파티에서 만난 미국인 부부가 그를 후원했다. 송 전 총장은 67년부터 미국 코네티컷대 경영대학원 교수로 10년 재직했다. 테뉴어(종신재직권)를 받았지만 76년 연대로 돌아왔다.
“미국 가기 전에 백낙준 총장이랑 서약을 했어요. 귀국하면 돈 많이 줘도 회사 안 가고 꼭 교수 하겠다고. 그 약속 지킨다고 가족에게 굉장히 미안했어요. 아버지 없이 미국서 학교 다니느라 애들이 고생을 많이 했지. 아내는 2년 뒤에 들어왔어요.”
대학생 때 교회에서 만난 부부는 함께 유학을 가서 64년 결혼했다. 의사인 아내는 미국에 병원을 차렸다. “어떻게 하루아침에 다 포기하고 나가느냐”던 아내는 결국 병원 문을 닫았다. 한국에선 미8군 병원에서 일했다. 송 전 총장은 연대에서 재무처장, 상경대학장, 기획실장, 교수평의회 의장 등을 거쳐 총장까지 한달음에 올라갔다.
“처음엔 총장 같은 거 생각 안 했어요. 내가 귀국한다니까 선생들이 ‘와서 뭐 할 거냐’고 묻더라고. ‘훌륭한 선생이 되겠다’고 했어. 그런데 가만 놔두지 않고 선배 총장들이 자꾸 일을 시키는 거야.”
-그때 말한 ‘훌륭한 선생’은 어떤 선생입니까.
“내가 회계학 교수니까 최소한 회계학에선 연대를 대한민국 1등 대학으로 만들겠다고 했어요. 그러려면 공인회계사가 많아야 돼. 연대 애들은 회계사를 별로 안 했는데 그때부터 연대 출신 합격자가 제일 많아.”
-85년 학교 설립 100주년 때 100억원 모금 운동을 성공시켰습니다.
“기획실장을 할 땐데 분교 만들고 학생 증원하면서 재정이 참 나빴어요. 100억은 학교 재정에 중요한 게 아니었어요. 상징적인 거였지. 100주년에 100억 모금한다는 게 한국에서 처음이었으니까.”
-92년 총장 선거 땐 모금 목표를 500억원으로 올렸죠.
“100억 한 경험이 있어서 얼마를 할지 참 고민이었어. 날 돕는 교수들하고 상의하니까 그 정도 하자고 하더라고. 너무 많이 할 수도, 적게 할 수도 없지 않으냐면서. 그때 500억은 대단한 거예요.”
그가 총장으로 있은 4년간 학교에 들어온 돈은 2172억여원이었다. 발전기금이 1383억여원으로 73.8%를 차지했다. 약속한 500억원의 2.8배쯤 되는 돈을 거둬들인 것이다.
-모금 노하우가 뭡니까.
“열심이 제일 중요하지. 총장 되자마자 대한민국 재벌 회장들한테 인사 다녔어요. 그 양반들은 굉장히 의아해하는 거야. 총장이 와서 도와 달라는데 안 도와줄 수 있어? 돌아가신 현대그룹 정세영 회장도 내가 몇 번씩 만났지. 그 양반은 고려대 출신이에요.”
-발로 뛰는 총장이었군요.
“그때 신문 동정란에 내가 국무총리보다 많이 나왔어. 하룻저녁에 몇 탕씩 뛴 거야. 10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는 거 아니오. 동문들한테는 저금통 5만개를 뿌렸어요. 동문 만나러 저금통 들고 세계 44곳을 다녔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까지 갔으니까.”
-영업사원처럼 쫓아다닌다고 ‘세일즈 총장’이란 말을 들었습니다. 체면 생각은 안 했습니까.
“나를 위해 돈 달라는 게 아니니까. 학교가 발전하니까 도와 달라고 정정당당히 말했어. 그때 기업들은 ‘다른 대학들이 왜 연대만 주느냐고 하면 어떡하느냐’는 거야. 돈 주고도 ‘줬다고 말하지 말라’는 데도 있었어. 어떤 회장은 나랑 고대, 카이스트 총장을 불러서 똑같이 70억원씩 주더라고. 그 사람들은 내 덕에 잿밥 먹었지.”
-재벌 중엔 누가 가장 인상적이었습니까.
“이건희 회장이 가장 인상적이었지. 만나자고 했더니 시간이 없는데 점심을 같이 먹으면서 얘기할 수 있느냐는 거야. 그 양반 덕을 많이 봤지. 고대가 교우회관 지으려고 할 때 정세영 회장은 나 만나면 ‘삼성 가서 돈 어떻게 받았느냐’고 묻는 거야. ‘내가 정 회장님한테 어떻게 받았어요? 삼성이 5억 냈는데 현대도 5억 내야 할 거 아니냐고 했잖아요’ 하니까 그걸 그대로 쓴 거냐면서 웃더라고.”
-그런데 발전기금 1383억원은 약정액이고 실제 모금액은 훨씬 적었다는 말이 있더군요.
“나 싫어하는 사람이 하는 소리지. 발전기금은 다 들어온 돈이에요.”
그는 요즘 대세인 ‘CEO(최고경영자) 총장’의 원조다. 대학도 기업처럼 경영해야 한다는 발상을 도입했다. 연대 총장 때 입시를 책임지는 입학관리처, 홍보를 전담하는 대외협력 담당 부총장직을 국내 대학 최초로 신설했다. 지금은 모든 대학에서 가장 바쁜 부서로 꼽힌다.
-이젠 CEO 총장이 한둘이 아닙니다.
“안 할 수가 없어. 지금은 안 하면 학교가 망할 텐데.”
-일 많이 시킨다고 교직원들은 별로 안 좋아합니다.
“우리 기사도 얼마나 힘들어했는데. 그러나 교수 도움 없이는 안 돼요. 내가 제일 고마운 게 이과대 교수들이 내 말을 다 받아들이고 교수평가 같은 건 자기들이 한 발 더 나갔어. 또 나는 외국계 컨설팅 회사를 끼고 해서 교수들이 큰소리를 못 했어요. 혼자 했으면 객관성을 담보 못했겠지.”
-대학에 경영 마인드가 꼭 필요합니까.
“이제는 대학 규모가 크니까 자산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해요. 교과서적인 얘기지만 주어진 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쓸지 생각해야지. 등록금도 한계가 있잖아요.”
-효율성만 좇으면 인기 없는 학과는 죽는 거 아닙니까.
“사립대는 어느 수준이 되고 나면 학교 안에서도 경쟁시켜야 해요. 공대 법대 경영대 의과대처럼 살아남을 수 있는 덴 저희가 알아서 해야지. 총장이 하는 건 한계가 있거든. 나머지 기초 학문은 학교가 지원해야지. 수학 공부는 해야 할 거 아니오?”
-등록금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2006년 연세동문회보 기고문에서 “사립대 등록금이 연 1000만원은 훨씬 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곤욕을 치렀습니다. 그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까.
“변함없어요. 어려운 사람을 어떻게 도와주느냐 하고 등록금을 덮어놓고 깎는 건 구분해야 해요. 신세계 같은 회사는 정년퇴직하고도 10년간 학자금을 대준다잖아. 그런 애들 등록금은 왜 깎아? 하버드대는 연소득 6만6000달러가 안 되는 집 애들한텐 다 장학금을 줘요. 그런 시스템이 돼야 한단 말이에요.”
-소신이 뚜렷합니다. 그러면 적이 많지 않습니까.
“평교수 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그러나 책임 있는 자리에 오르면 만인을 행복하게 해줄 순 없어요. 세상사람 요구가 다 다른데 그걸 어떻게 다해. 언젠가는 무슨 결정을 딱 해야 한다는 거야. 그럼 싫어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고 적이 생기는 거지.”
-이견이 많을 때 우선순위는 뭡니까.
“내가 속한 조직이 발전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쪽이지. 시장경제가 상대적으로 좋은 건 누구나 아는데 이것도 문제는 있잖아. 지금 미국서 데모하는 게 그런 데서 나온 거 아니겠어요? 있는 자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거요. 선한 사마리아인이 많아야 해. 있는 자가 잘못하면 저런 데모가 자꾸 일어나는 거요. 나는 기독교가 할 일이 굉장히 많다고 봐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종교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다는 겁니까.
“기독교는 나눠주는 종교, 섬기는 종교 아니에요? 성경 보면 예수님이 부자 청년한테 (가진 걸) 나눠 주라고 하잖아요. 가진 게 없으면 나눠줄 수가 없어요. 있는 자가 된 다음엔 나눠줄 줄 알아야 돼.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에요.”
-우리나라 기독교는 나눔 정신이 부족하지 않습니까.
“노(No). 내가 국제이사인 월드비전에서 도움을 주는 나라는 16개국이에요. 우리나라는 미국 캐나다 호주 다음으로 도움을 많이 줘. 잠비아를 지난여름에 갔는데 거기선 우리가 2등이더라고. 이렇게 도움 주는 건 부자나 대형교회가 아니야. 평범한 기독교인들이 이름도 빛도 없이 돈을 내는 거지. 월 3만, 4만원씩 내는 사람이 45만명이에요. 그 돈이 한 1500억원 돼.”
그는 2000년 8월 제41대 교육부 장관 취임 24일 만에 사퇴했다. 그와 가족의 한·미 이중국적, 그가 삼성전자 사외이사로 있으면서 실권주(失權株)를 인수해 시세 차익을 올린 점 등이 발목을 잡았다. 미국 국적은 안정된 현지 생활을 위해 받은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중국적은 그렇다 쳐도 시세 차익 부분은 부적절했다고 인정하는 겁니까.
“노(No). 시세가 떨어져서 적자가 나면 어떻게 할 뻔했겠어? 공짜로 받은 것도, 내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어요. 현금화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안 사서 실권이 되니까 하는 수없이 사외이사들에게 배당한 거 아닙니까. 그 주식으론 친구랑 장학재단을 만들어서 학생들 장학금을 주고 있어요.”
장관에서 물러난 그는 학습지를 만드는 대교에 들어갔다. 그가 연대 총장일 때부터 동문인 강영중 그룹 회장이 교육 분야를 맡아 달라고 했었다. 송 전 총장은 이때부터 복지사업을 시작했다.
-나이 들면서 변한 게 있습니까.
“별로 없어. 가르치고 학교 행정 하면서 시간이 다 간 것 같아. 그러면서도 변하지 않는 게 뭐냐? 오늘 동국대 강의를 가는데 그런 게 나한테 가장 즐거운 일이오. 가르치는 일이 없으면 재미가 없을 것 같아.”
■ 연보
△1936년 대전 유성 출생
△1959년 연세대 상학과 졸업
△1967년 미국 워싱턴대 경영학 박사
△1967∼76년 미국 코네티컷대 경영대학원 교수
△1976∼92년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1992∼96년 연세대 총장
△1997∼2000년 명지대 총장
△2000년 제41대 교육부 장관
△2001∼2007년 ㈜대교 회장
△2003년 한국사이버대 총장
△현재 아이들과미래 이사장, 명지학원 이사장, 연세대 재단이사 등
글 강창욱 기자·사진 강민석 선임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