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4) 日 소비자운동 기수 어머니… 노벨상 후보 올라
입력 2011-10-19 17:50
어머니 노무라 가츠코는 아주 비범했다. 나를 외가에 맡겨놓은 채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 신학부에 입학했다. 그때가 1936년이었다. 당시만 해도 여자가 대학에 들어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4년제 대학은 더 그랬다. 어머니로서는 대학을 가기 위해 나를 포기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한국 유학생이던 서남동 박사와 함께 공부했다. 서 박사는 얼핏 보면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민중신학 책을 쓰기도 하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일본에 와서 우리 가족을 방문하기도 했다. 서 박사는 한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많은 책과 서류, 정보를 일본에서 접했다. 서 박사와는 이후 한국과 일본에서 여러 차례 만나 교제했다.
어머니는 신학부에 다니는 동안 미국 선교사의 집에 머물면서 타이프 치는 일을 했다. 그래서인지 내가 초등학교 때는 경찰이 내게 와서 어머니에 대해 많이 묻기도 했다. 책 속에 혹시 무전기가 숨겨져 있지 않은지 뒤지기도 했다. 나중에 내가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받았던 감시와 수색을 당하는 것과 같았다. 당시는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이었으니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일체 권력과 타협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대학 졸업 후 도쿄로 갔다. 그때만 해도 도쿄에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동 제한 때문이다. 어머니가 도쿄에 간 것은 가가와 도요히코의 노동자운동, 소비자 조합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 일본인들이 군수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상황에서 노동자를 위해 일한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진 뒤엔 맥아더 장군이 일본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친미(親美) 일본인들을 리더로 세우려고 했다. 그리고 일본의 각계각층 지도자들을 미국으로 초청해 교육을 시켰다. 미국이 민주주의와 경제 강국이라는 걸 은연중에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맥아더는 일본 여성 10여명을 뽑아 미국으로 보냈는데 그중에 어머니도 포함됐다. 어머니는 미국에서 몇 개월 뒤 돌아왔지만 결코 소신을 바꾼 적이 없다. 미국에 대해 얘기할 때 좋다는 것은 좋다고 하고 나쁜 것도 나쁘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 후 중국과 러시아의 여성단체들로부터도 초청을 받았다. 중국과 러시아에 대해서도 호불호를 분명히 했다. 결국 미국이나 중국, 러시아 어느 나라도 어머니를 이용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만큼 어머니는 독립심이 강한 여성이었다.
어머니는 미국 소비자운동 지도자인 랄프 네이더를 아시아에 처음으로 소개했다. 네이더는 제너럴 모터스(GM)를 비롯한 미국 자동차 회사들에 대해서도 ‘안전성이 떨어지는 자동차를 생산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책을 썼다. 어머니는 그만큼 노동자, 소비자, 여성 등을 위한 실제적인 운동을 벌였다. 어머니는 그 후 한국의 소비자운동단체로부터 초청을 받았고, 1993년엔 가나안농군학교로부터 일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5년엔 노벨상 후보로도 올랐었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크리스천 사회정의운동을 배웠다면 어머니로부터는 그것을 어떻게 실천하는가를 배운 셈이다. 어머니는 사회운동은 입술이나 머리만이 아니라 손과 발로 하는 것임을 내게 가르쳐주셨다. 어머니는 지난해 9월, 99세의 나이로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어머니의 유언대로 유해를 태평양 바다에 뿌렸다. 지난번 지진과 쓰나미 때문에 아마 그 유해들이 골고루 섞였으리라 생각한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