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노무라 모토유키 (1) 속죄하려 시작된 한국사랑이 은혜가 되었다

입력 2011-10-16 17:32


지난달 중순 도쿄에서 4시간 거리의 야마나시현 야쓰가다 산중턱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 집을 찾았을 때, 한국 사람에게는 너무나 친숙한 ‘비목’ 피리 연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노무라 목사는 봉선화, 선구자, 애국가 등을 자주 연주한다고 했다.

나는 단 하루도 남한 사람들과 북한 사람들, 특히 북한 어린이들을 생각하지 않는 날이 없다. 아침마다 뉴스에서 일기예보를 할 때마다 한반도 지도와 일기상황도 전해준다. 그때마다 남북한을 생각하며 매일 기도한다.

어쩌면 나는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그 이상으로 한국을 생각하는 것 같다. 누군가는 이런 나를 보고 ‘목사님 핏속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르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뚜렷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렴풋이 드는 한 가지 생각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사죄의 마음 때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일본의 침략은 국가의 범죄였다. 한국인이나 북한 사람들에게 사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국가 사죄와 별도로 크리스천으로서, 일본인으로서 개인적으로 할 수 있는 한 한국인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늘 남한과 북한 사람, 중국이나 중앙아시아에 있는 고려인들에게 어떻게 사죄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산다. 하지만 이것은 너무나 커다란 문제이기 때문에 절망할 때가 많다. 대신 개인이 할 수 있는 조그만 일이 뭘까 생각한다. 심지어 재난이 닥쳤을 때도 일본인보다 한국인, 조선인(조총련)을 먼저 생각한다. 지난번 일본에 쓰나미가 덮쳤을 때도 백방으로 연락했다. 한국의 백경학(푸르메재단 상임이사)씨, 도쿄에 주재하고 있는 한국 일간지 기자에게도 연락했다. 지진 피해를 입은 남한이나 북한 유학생들을 찾아달라고. 도쿄의 한국 기독교 교단에도 연락해 몇 사람 소개를 받았다. 그래서 센다이에 있는 조선소학교와 미토시에 있는 조선인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도울 수 있었다.

아들 마코토와 딸 메구미가 어렸을 때 난 청계천과 제암리, 파고다공원 등에 데리고 간 적이 있다. 그 후로 이들은 ‘일본의 침략은 잘못됐고 반드시 반성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지금은 1년에 여러 차례 휴가를 내고 한국의 푸르메재단의 장애인시설에 가서 봉사를 하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어려운 환경에서 학교를 다니고, 성인으로 성장하고, 청계천 빈민운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내 의지가 강하거나 똑똑해서가 아니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다. 특히 30대 때 나에게 살아있는 신학교였던 청계천 빈민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야말로 가장 큰 은혜였다. 난 목사는 한 분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바로 예수님이다. 나는 예수님의 노예일 뿐이다. 하지만 행복한 노예다.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는=1931년 일본 교토 출생. 목사이자 사회운동가. 도쿄수의축산대학, 미국 켄터키성서대학, 남동부기독교대학, LA 바이올라대학, 페퍼다인대학원 등에서 수학했다. 61년 귀국 후 목회를 하다가 68년 한국을 방문, 청계천 빈민의 참상을 보고 충격을 받아 한국 빈민선교에 나섰다. ‘빈민운동의 대부’ 고(故) 제정구 의원을 도와 85년까지 한국을 50여 차례 방문하면서 청계천 판자촌 빈민들을 대상으로 구제 및 선교활동을 펼쳤다. 청계천 관련 사진, 스크랩북, 메모지, 한국지도 등 800여건의 개인 소장 자료를 지난 2006년 서울시에 기증했다. 지금은 일본 야마나시현 야쓰가다산 산골에서 가정교회인 베다니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