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몸, 야함과 음란과 예술…그 경계는?
입력 2011-10-14 17:36
아트파탈/이연식/휴먼아트
인간의 벗은 몸은 논란거리다. 하지만 목욕탕의 전라와 수영장의 반라가 문제되지 않듯, 문제는 “알몸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또 얼마나 드러내고 감출 것인가. 미술사가인 저자는 ‘아트파탈’에서 노출과 은폐를 통해 야한 것과 미술의 관계, 음란한 것과 예술의 경계를 탐색한다. 드러나고 감추는 긴장 속에서 세상의 시선과 도덕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따진다. 책은 논쟁적이라기보다는 차분하고, 놀랍다기보다는 흥미로운 미술사 안팎의 에피소드로 채워졌다.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과 에두아르 마네의 ‘올랭피아’ ‘풀밭 위의 점심’은 19세기 부르주아의 위선을 꼬집는 예로 종종 비교된다. 신화를 소재로 우아한 누드를 그린 카바넬 작품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마네 작품은 19세기 중반 파리 예술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그림 속 투박한 나신이 이웃집 침실 속 광경인 듯 현실적이어서 감상자를 당혹스럽게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통용되는 진리지만, 벗는 건 현실이 아니라는 가정 하에서만 용인됐다. 나신은 그저 ‘옷을 벗은’ 알몸(naked)이 아니라 ‘균형 잡히고 건강하며 자신만만한’ 누드(nude)여야 했다.
귀스타브 쿠르베의 ‘세상의 근원’이 세상에 나서는 과정은 거실용 그림이 예술품으로 승화되는 지난한 과정을 보여준다. 원래 ‘세상의 근원은’ 1866년 파리 주재 터키 대사 칼릴 베이의 주문으로 제작된 개인 감상용 나체화였다. 칼릴 베이가 파산하면서 그림은 골동상, 화랑을 거쳐 1910년 헝가리 귀족의 손에까지 흘러들어간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소련군에 압수됐다가 1955년 경매에서 150만 프랑에 팔린 그림은 이후 자취를 감춘다.
나중에 알려지길 익명 매수자는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이었다. 라캉은 작품을 철저히 숨겼다. 시골집에 감춰두고 지인에게만 보여줬고, 심지어 ‘덮개 그림’으로 아예 그림을 감춰버렸다. 사적 공간에서조차 그림을 위장한 것이다.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던 ‘세상의 근원’은 라캉 사후 1995년 6월 26일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공식 등재된다. 130년 만에 존재를 공인받게 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노출은 이목 끄는 확실한 방법이지만, 감춰서 더 유명해진 작품도 있다. 성경 속 다윗과 밧세바의 불륜을 그린 그림으로는 렘브란트의 ‘밧세바’가 유명하지만, 얀 스텐의 ‘밧세바’는 누구나 상상하는 밧세바의 나신을 배제해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만들었다. 다윗이 반한 목욕하는 밧세바 대신 얀 스텐은 다윗의 연서를 받아든 채 정면을 향해 도발적 표정을 짓는 밧세바를 그린다. “파도처럼 밀려와 소용돌이처럼 휘감는 운명”이 감지되는 순간의 포착이다.
댓돌 위에 나란한 남녀의 신발 앞에서 뺨이 붉어진 계집종을 그린 ‘사시장춘’(신윤복이 그린 것으로 추정), 남자 앞에서 조용히 포도주를 기울이는 붉은 드레스의 여인을 담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포도주를 마시는 여인’도 감춰서 더 드러나는 그림이다.
이영미 기자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