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모래, 푸른 숲, 붉은 바다 ‘색깔 다른 산책’… 안면도 노을길 트레킹

입력 2011-10-12 17:44


가을이 깊어 가면 더욱 성숙해지는 바닷길이 있다. 밀가루보다 고운 백사장은 여인의 속살처럼 부드럽고, 노을에 젖은 바다는 여인의 입술보다 붉다. 지아비와 지어미의 천년 사랑이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바닷길은 안면도의 백사장항에서 꽃지해변까지 이어지는 12㎞ 길이의 노을길이다.

지난 6월 첫선을 보인 충남 태안의 노을길은 안면대교를 건너자마자 만나는 백사장항에서 시작된다. 안면도는 본래 육지였으나 조선 인조 때 삼남지역의 세곡을 운반하기 위해 남면 신온리와 안면읍 창기리 사이의 곶을 절단해 섬이 됐다. 안면도를 육지와 연결하는 안면대교에서 보는 백사장항의 야경은 한 폭의 그림.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남면의 드르니항과 마주한 백사장항은 꽃게잡이와 대하잡이의 전진기지. 대하축제가 열리고 있는 백사장항에 들어서면 하얀 소금 위에서 빨갛게 익어가는 대하의 구수한 냄새가 발길을 붙잡는다. 작지만 정겨운 포구마을의 정취에 취해 골목길을 걷다 보면 넓은 솔밭길이 시작되는 안면도해양유스호스텔이 나온다. 유스호스텔 앞의 드넓은 솔밭과 백사장해변은 청소년 수련장으로 사철 함성 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

백사장항의 활기를 뒤로 한 노을길은 백사장해변이 끝나는 곳에서 바닷가 야산인 삼봉을 오른다. 삼봉에는 태풍에 쓰러진 소나무를 모아 군데군데 야생동물 비오톱(서식공간)을 만들어 놓았다. 동물과 인간이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서다.

야산 정상에 설치된 삼봉전망대는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리아스식 해안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포인트. 수평선에는 거아도 울미도 삼섬 지치섬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모여서 정담을 나누고, 파도소리와 솔바람소리는 심신을 청량하게 한다.

태안해안국립공원에서 조성한 노을길은 태안반도 최북단의 학암포에서 최남단의 영목항까지 이어지는 120㎞ 길이의 태안해변길 중 제5구간. 탐방객들이 사계절 태안을 찾도록 함으로써 원유 유출 사고로 침체된 지역 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삼봉을 하산한 노을길은 이내 ‘사색의 길’로 명명된 600m 길이의 곰솔 숲길을 걷는다. 25∼30m 높이의 곰솔 수천 그루가 터널을 이루는 숲길은 기지포해변과 맞닿은 송림. 이른 아침 옅은 안개가 커튼처럼 드리운 풍경도 아름답지만 낙조에 황금색으로 물드는 곰솔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노을길은 ‘사색의 길’이 끝나는 곳에서 두 갈래 길로 나눠진다. 안쪽 길은 양탄자처럼 푹신푹신한 모래숲길이고, 기지포해변을 벗한 바깥 길은 휠체어와 유모차가 다닐 수 있도록 나무데크로 조성된 1004m 길이의 ‘천사길’이다. 태안해안국립공원이 교통약자를 위해 조성한 길로 시점과 종점에는 해변으로 내려갈 수 있도록 데크가 연결돼 있다.

마을의 형태가 베틀을 닮아 ‘베틀 기(機)’ ‘연못 지(池)’ ‘포구 포(浦)’를 써서 기지포로 명명된 기지포해변은 신두리처럼 본래 모래언덕으로 형성된 해안사구였다. 밀가루보다 고운 모래가 바람에 실려와 쌓였다가 또 바람이 불면 금세 다른 모양으로 변신하는 신비의 땅으로, 해당화를 비롯해 갯그령 갯쇠보리 통보리사초 등 사구식물이 서식하는 생명의 땅이었다.

그러나 무분별한 개발로 사구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태안해안국립공원이 2002년 대나무를 지그재그로 엮어 만든 모래포집기를 설치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다시 모래가 쌓이기 시작하더니 2009년부터는 사구가 원래 모습대로 복원되고 사라졌던 사구식물들도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풍천을 가로지르는 창정교를 건넌 노을길은 두 번째 전망대인 두여전망대를 오른다. 두여전망대는 독특한 형태의 해안습곡과 밧개해변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 달랑게를 비롯해 온갖 어패류가 서식하는 밧개해변의 주인은 겹겹이 밀려오는 파도를 배경으로 날개를 접은 채 우두커니 서 있는 갈매기들. 천수만에서 솟은 태양이 안면도를 가로질러 서해로 기울자 녀석들이 비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한다.

밧개해변에서 다시 야트막한 야산을 탄 노을길은 방포해변과 방포전망대를 거쳐 꽃다리가 아름다운 방포항으로 내려선다. 꽃다리는 꽃지해변과 방포를 잇는 아치형다리. 2002년 안면도국제꽃박람회 개최를 계기로 꽃다리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얻었다. 꽃지해변의 낙조를 감상하는 또 하나의 명소로 해질녘에는 사진작가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

4시간에 걸쳐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넌 노을길은 꽃지해변에서 장엄한 낙조를 맞는다. 변산 채석강·강화 석모도와 함께 서해안 3대 낙조 명소로 손꼽히는 꽃지해변은 해변을 따라 해당화가 많이 피어 ‘화지(花池)’로 불리던 곳으로 두 개의 바위섬 사이로 지는 낙조가 일품이다.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로 불리는 바위섬은 해상왕 장보고의 부하 승언 장군이 전쟁터에 나간 후 돌아오지 않자 아내 미도가 일편단심 기다리다 죽어 망부석이 됐다는 순애보의 전설이 전해오는 곳. 붉은 태양이 할아비바위에 뿌리를 내린 노송 가지에 걸리자 기다렸다는 듯 갈매기들이 날아오르기 시작한다.

붉게 채색된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할미바위와 할아비바위의 실루엣이 돋보이는 꽃지해변은 두터운 질감의 유화를 연상하게 한다. 포구로 돌아오던 어선 한 척이 반쯤 가라앉은 해 속에 갇히고 검은 갈매기들은 무시로 해 속을 드나들며 풍경화의 주인공이 된다. 노을길이 가장 노을길다운 순간이다.

태안=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