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짜 맞던 두 여자 신데렐라 되다

입력 2011-10-06 21:26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인형은 토토다. 나는 말을 본 적은 없지만, 말이 좋다.’ (달려 토토)

‘어느 날은 넓은 하늘 만나고 싶은 날.’ (어느 날) 두 권의 동화책을 무릎 위에 펼쳤다. 맑고 파란 하늘 대신 베이지색 하늘이, 예쁜 집 대신 우뚝 선 빌딩 숲이 그려진 ‘어느 날’은 한 폭의 수묵화를 닮았다. 어린 여자아이의 눈에 비친 경마장 풍경을 그린 ‘달려 토토’는 명랑하기보다 슬픈 동심을 담았다.

‘달려 토토’와 ‘어느 날’은 지난달 세계 3대 동화책 상의 하나로 꼽히는 BIB(Biennial of Illustrations Bratislava)에서 각각 그랑프리(1위)와 황금사과(2위)상을 휩쓸었다. 그것도 신인 작가들의 첫 동화책이 이룬 쾌거였다. BIB 측은 두 그림책에 대해 “독자의 시선을 잡아끄는 이야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펼쳐지는 놀라운 그림” “고요한 정취 속에서 빛나는 음악적이고 시적인 그림”이라는 심사평을 내놓았다. 한국인이 BIB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난달 30일 두 여성 작가를 서울 여의도 한 카페에서 만났다. ‘달려 토토’의 조은영(30), ‘어느 날’의 유주연(28) 작가. 이들을 축하하며 언제 다음 책이 출간되는지 물었다.

“모르겠어요(웃음). 다음 책을 출판사에 가져가면 그래도 예전과 달리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봐 주시긴 할 것 같아요.” (조은영)

“다른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찾아줄 때인 지금 빨리 다음 책을 내야 돼. 그렇지, 언니?” (유주연)

이렇게 말하면서도 두 작가는 키킥∼ 웃었다. 이들은 서울시립대 디자인전문대학원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했다. 이번에 수상한 동화책은 대학원 재학 시절인 2009년 3월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린 국제아동도서전 간이 부스에 단체 전시한 작품이다. 당시 두 책은 관람객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유 작가는 도서전이 끝난 뒤 ‘어느 날’을 들고 출판사를 전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밝고 명랑하지 않은 내용의 그림책을 출간해 주지 않을 게 뻔했고, 출판사의 그림 수정 요구를 받아들일 자신도 없었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보림출판사의 ‘컬렉션 시리즈’ 덕분에 첫 책을 출간했다. 컬렉션 시리즈는 동화 작가들의 그림 원안을 존중하고, 어른들도 소장하고 싶은 그림책을 만들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이 시리즈 1, 2호가 두 작가의 책이다.

“동화책을 통해 아이들에게 교훈적인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주고 싶진 않아요. 그래서 글을 길게 쓰진 않았어요. 대신 그림을 통해 외로워 보이는 도시가 때론 아름답고 신비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림책의 주인공인 새가 바로 저라고 상상하며 책을 만들었답니다.” (유주연)

‘어느 날’은 그림 위주의 동화책이다. 작고 빨간 새가 거대한 도시를 여행하며 친구를 찾아간다. ‘빌딩 숲 사이에는 빠른 시간이 사는 곳.’ ‘날아 보고 싶은 곳은 하늘로 뻗어 오른 땅의 길.’ 짤막한 글이 수묵화풍의 그림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적혀 있다. “안녕, 새로운 세계로 마지막 인사.” 도시를 떠나 강물 위를 나는 새가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동화는 끝난다.

유 작가와 달리 조은영 작가는 ‘달려 토토’를 들고 여러 출판사를 전전했다. 물론 퇴짜였다. 출판사로부터 환영받지 못한 경험은 당시가 처음은 아니었다. “선생님은 왜 대머리죠?” “남자 애들은 정신 지체 장애인 같이 생겼군요.” 다른 작가가 쓴 동화책 삽화를 그리던 과거에도 이런 지적을 종종 받았다.

조 작가는 ‘내가 그림을 못 그리나 보다’ 좌절했다. 동물을 좋아하는 그는 공부를 다시 해 수의사가 될까, 고민도 해봤다.

2년 전 서울 삼성동 코엑스 전시장에서 ‘동화 작가가 그려주는 아이 얼굴’ 이벤트를 했다. 그때도 조 작가 캔버스 앞에 대롱대롱 줄 선 아이들은 어깨너머로 그림을 흘끔흘끔 쳐다보곤 다른 줄로 가버렸다. 두 눈 사이가 먼 아이는 더 멀어지게, 코가 동그란 아이는 더 동그랗게, 얼굴이 네모난 아이는 더 네모지게 그렸더니 영∼ 인기가 없었다.

‘달려 토토’를 출간하기 전에도 주위에선 고개를 갸웃했다. 경마장에서 돈을 걸고 경주를 즐기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동화책으로 어울릴까?

“어른의 시각에서는 아이들이 늘 행복한 것처럼 보이죠. 하지만 아이들도 매일 기쁘지는 않아요. 다들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상처 받았던 기억이 더 오래가지 않나요? 제 동화책에는 손녀딸이 아빠 대신 할아버지와 경마장에서 놀아요. 맞벌이 부부가 증가해 조부모 밑에서 크는 애들도 많거든요. 제 책을 본 아이들이 ‘아∼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나만 아빠 대신 할아버지랑 노는 게 아니구나’ 이런 위로를 받았으면 좋겠어요.” (조은영)

조 작가는 사진 동호회 회원들과 경마장에 갔을 때 할아버지를 따라온 손녀딸을 봤다. 그리고 이 책을 만들었다. ‘달려 토토’의 단발머리 여자아이는 자신이 응원한 9번 말이 이기자 돈을 잃고 슬픔에 빠진 어른들을 이상하게 쳐다본다.

‘다음 주에도 또 그 다음 주에도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경마장에 갔다. 그런데 점점 지겨웠다.

그리고 나는 토토를 다시 볼 수 없었다.

사실 토토를 다시 본다 한들 알아볼 수 없을 것 같다.

왜냐면 언제부턴가 말들이 다 똑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동화책은 이렇게 끝난다. 두 작가와 헤어지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동심’은 뭘까?

“동심은 어린이만이 갖고 있는 천진한 세계가 아니다. 사람 마음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선한 정서다. 어린이지만 동심이 없는 어린이가 있고, 어른이지만 동심이 있는 어른도 있다. 동심은 맑은 영혼이다.”

선배 동화 작가인 류재수(57) 보림출판사 자문위원이 이들에게 해준 얘기란다.

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