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 선교 100주년] (4)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선교사 中 산둥성 라이양에 파송되다

입력 2011-09-29 18:13


선교사 3인방 ‘소통 의식주 문화적응’ 삼중고

취재팀은 웨이하이(威海) 원덩(文登) 옌타이(煙臺)를 거쳐 초기 한국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던 라이양(萊陽)으로 이동하면서 중국교회 지도자들은 처음 만난 한국 선교사들에 대해 어떤 마음이었을까 상상해보았다. 처음부터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을 터이다. 박태로(朴泰魯) 김찬성(金燦星) 목사가 1913년 5월 산둥선교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옌타이에 도착했을 때 마침 중화예수교장로회 화북(華北)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중국 선교사 파송 의지를 밝히자 중국인들 사이에서 처음엔 불가능할 거라는 곱지 않은 반응이 나왔다.

“중화(中華)는 고대의 문명국이오 역사가 심장한 대국(大國)이며 세계 4분지 1의 인구를 가진 국가라 교만과 자존심이 많아 자칭 대국이라 하야 소국을 멸시하는 고래적 습행이 있으니 중화(中華)와 조선(朝鮮)은 자고로 관계가 되어 대소와 조완의 차별을 두는 관계로 조선교회가 중화에 선교는 다방으로 고난이라.” 분명한 반대의사였다. 나라 잃은 민족과 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라고? 너무나도 생소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거다. 이처럼 삐딱하게 나오던 중국 목회자들이 결국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산둥선교를 허락하게 됐다. 윌리엄 블레이어 헌트(韓韋廉·William Blair Hunt) 선교사의 사전 조율이 힘이 됐고 한국교회 또한 겸손히 현지교회와 협의를 통해 협조를 구한 게 결정적 역할을 했을 것이다.



박태로 김영훈 사병순 목사, 초기 선교사 3인방

9월 7일, 경성(京城·서울)에서 제2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소안동교회(현재 서울 안동교회)에서 개최됐을 때 박태로 목사는 산둥 지역을 시찰했던 내용을 총회대의원(총대)들에게 설명했다. 총대들은 그의 보고를 받고 매우 기뻐했다. 이어 그해 평양신학교 6회 졸업생인 김영훈(金永勳), 사병순(史秉淳) 목사를 선교사로 선택했다. 1913년 총회는 한국선교사에 의해 교회가 설립되면 소속을 중국노회에 두도록 한다는 결의도 했다. 선교사의 이명문제는 거론하지 않았다. 다만 선교사가 귀국 시에는 총회에 언권위원으로 참석케 하기로 했다.

1914년 발행된 중화기독교회연감은 한국교회의 선교사 파송 사실을 이렇게 기술했다. ‘高麗長老會於一千九百十三年派人至山東佈道’ 우리의 국호를 ‘고려(高麗)’로 한 것은 색다르다.

사병순 목사는 1913년 6월 12일 평남노회에서, 김영훈 목사는 같은 해 8월 26일 평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앞서 1912년 6월 30일 목사 안수를 받은 박태로와 함께 초기 중국 선교사 3명 모두 오늘의 북한 지역교회 출신이었다.

육군 참령과 의주 군수를 지낸 부친을 둔 김영훈 목사는 유복하게 자라났다. 그의 부친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모든 관직을 내던지고 귀향해 기독교인으로 살았다. 이 때문에 김영훈은 자연스럽게 목회자의 길에 들어서게 됐다. 그는 1910년 평북 의주군 월화면의 교회를 돌보는 조사(助師) 역할을 했다. 1913년 2월 19일 선천읍교회에서 열린 제3회 평북노회에서는 장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월화면 호암교회 장로가 된 뒤 신학교 졸업과 함께 제4회 평북노회에서는 목사안수를 받았다. 김영훈 목사는 한학과 한시에 능했다. 이는 라이양에서 처음 선교를 시작할 때는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없었지만 중국인들과 필담을 나눌 수 있는 기초가 됐다.

선교사로 떠나기 앞서 사병순 목사에 대한 개인사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 1909년 제3회 예수교장로회 독노회(조선노회)가 개최됐을 때 남평안대리회 소속 장로 총대로 참석했다는 사실로 미뤄보아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의 적잖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짐작할 수는 있다. 당시 30대 초반인지라 결혼했을 터이지만 아내가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1909년에 이어 1911년 대구 남문안교회에서 열린 제5회 독노회에 총대로 참석했다. 1912년 1월 평남노회 조직노회록 기록에 따르면 그는 평남 평양 서면에 위치한 증산 방에다리교회에서 장로로 활동했다. 평양노회 서기가 될 정도로 능력 또한 인정받았다. 사병순 목사가 1913년 평양신학교 6회 졸업생이라는 것은 당시 학제가 5년인 점을 고려하면 1909년 경 신학교에 입학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목사장립과 함께 동사목사가 됐다.

동사목사란 당시 외국선교사와 같이 동역하는 목사로 위임동사목사와 임시동사목사로 나뉜다. 위임동사목사가 위임을 받고 선교사와 함께 지교회를 맡는 목사라면 임시동사목사는 위임을 받지 못했지만 선교사와 함께 지교회 일을 담당하는 목사를 지칭한다. 윌리엄 L 스왈랜(蘇安論·Swallen) 선교사와 동사목사로 일한 지 3개월 만에 그는 선교사로 임명받게 됐다. 그럼 누가 그에게 선교사로 가도록 제안했을까. 길선주 목사일 가능성이 크다. 평남노회 제5회록에 보면 “전도회 회장 길선주씨가 총회 전국에서 사병순씨를 중화민국에 선교사로 보낼 것을 본회에 보고하매…”라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선교사 3인방 일행의 중국행 루트와 낯선 환경

1913년 9월 하순 3명의 선교사와 그 가족은 안둥센(安東縣·현재 단둥)과 다롄(大連)을 거쳐 옌타이에 도착했다. 선교사 일행을 마중 나온 사람은 평양 장대현교회를 출석한 적이 있었던 중국인이었다. 선교사 일행의 중국행 경로는 이상규(李尙奎) 신문조서의 내용에서 다음과 같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21세의 9월 하순경 나는 당시 조선기독교장로회로부터 山東省으로 파견하는 선교사 朴泰魯, 史秉淳, 金永勳 등 3인 및 그 가족 등과 함께 기차로 安東縣까지 가서 1일 체재한 후 제14 共同丸을 타고 大連을 경유하여 지부(芝?·현재 옌타이)에 동년 10월 상순경 도착하고, 나는 그곳의 信道學校에 남고, 위 3인의 선교사 등은 山東省 來陽城이라는 곳으로 갔다.”

선교사 일행은 옌타이에서 며칠 간 머문 뒤 당시 산둥성에서 상당히 낙후된 라이양으로 향했다. 옌타이엔 서양선교사들을 위한 언어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신임 선교사들이 중국어를 배울 수 있었지만 한국 선교사들은 곧장 선교지로 달려갔다. 그러나 옌타이에서 라이양까지는 161㎞ 남짓 됐다. 두 마리 노새가 끄는 가마를 타고 가기엔 꽤나 먼 거리였다. 구토, 낯선 잠자리, 고국과 전혀 다른 거리, 알아들을 수 없는 ‘하이 톤’의 말 등 부닥치는 상황마다 선교사 부인과 자녀들에게는 충격 자체였다. 선교사 자녀들은 고향 친구들이 그리웠고 사모들은 고국 생각이 간절했다. 목사 선교사보다 사모나 자녀들은 더 큰 문화충격을 받았다.

선교사 일행이 라이양에 도착하자 그들을 원래 돕기로 했던 현지 중국인 전도자가 나왔다. 하지만 그는 일행을 한번 쳐다보고는 말없이 가버렸다. 새로운 사역자들이 오게 돼 자신의 일자리를 잃어버리는 건 아닌지, 시기심이 일어난 것은 아닐까. 갑작스런 돌출 행동에 선교사 일행은 이국에서의 밤이 무척이나 길었을 것이다. 급하게 필요한 가사도구를 빌려 보려 했지만 거절을 당했다. 그들을 존중해 주던 고국의 교회들이 매우 그리웠을 거다. 이때 옌타이에서부터 동행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어 교사의 도움을 받아 일행은 중국인 가옥에 겨우 여장을 풀었다. 이렇게 해서 라이양현 서문내(西門內)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사모들은 현지 적응이 쉽지 않았다. 남편들은 언어 공부, 외부인사 접촉 등으로 기분을 전환할 수 있는 기회를 갖지만 아내들은 상대적으로 덜했기 때문이다. 사모들은 음식 장만을 하는 것부터 골칫거리였다. 자유롭게 시장을 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쌀을 구경하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이 때문에 식습관을 점차 바꿔가야 했다.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곡물이라고는 밀가루, 소미(좁쌀) 뿐이었다. 사모들은 매일 집안일을 하면서 일상의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다. 쌀 대신 소미 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취재팀은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선교사의 행로를 따라 라이양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옌타이에서 남서쪽으로 차를 타고 3시간여를 가다 보니 라이양 초입이 나타났다. 초기 선교사 가족 일행에게는 3∼4일 길이었다.

라이양=글 함태경 기자·김교철 목사, 사진 서영희 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