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 300년 老木, 처마에 기대 가을을 부르다… 산청 ‘남사예담촌’ 고목 산책
입력 2011-09-28 21:22
고목나무에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마을이 있다. 지리산 천왕봉이 뒷동산인 경남 산청의 남사예담촌이 바로 그곳이다. 이 마을에서는 700년 전에 뿌리를 내린 매화나무가 대를 이어 꽃을 피우고 주홍색 감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600년 묵은 감나무에서는 홍시가 뚝뚝 떨어져 풀향기 꽃향기 그윽한 땅바닥을 뒹군다.
박씨, 이씨, 정씨, 최씨, 하씨, 강씨 등이 집성촌을 이룬 남사예담촌은 공자의 고향을 닮은 마을로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마을을 둘러싼 니구산(尼丘山)과 마을을 감싸고 돌아나가는 사수(泗水)는 공자의 고향인 곡부의 지형을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풍수지리적으로 숫룡과 암룡이 서로 머리와 꼬리를 무는 쌍룡교구 형상이라 걸출한 인재들이 배출됐다고 한다.
일찍이 고려시대에 윤씨 집안에서 왕비가 배출됐고 조선시대에는 하씨 집안에서 영의정이 탄생했다. 구한말에 파리장서(巴里長書) 초안을 작성한 후 일경에 빼앗길까봐 짚신을 삼아 한양으로 갔던 면우 곽종석도 이 마을 출신이고, 국악계의 큰 별인 기산 박현봉도 남사예담촌이 고향이다.
여느 마을과 달리 남사예담촌의 가을은 골목길에서 무르익는다. 경남의 하회마을로 불리는 남사예담촌의 상징은 지붕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돌담과 토담. ‘예담촌’이라는 이름도 ‘옛 담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3.2㎞에 이르는 돌담길 안팎에는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고목들이 옛 이야기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남사예담촌의 트레이드마크는 이씨 고가 골목길을 수문장처럼 막아선 수령 300년의 회화나무. 골목 양쪽에 뿌리를 내린 회화나무 두 그루가 휘어 X자로 보이는 기이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이른 아침 고가를 배경으로 햇살에 젖은 푸른 잎과 검은 고목 줄기가 연출하는 명암과 여백의 미는 그 자체가 한 폭의 동양화나 다름없다.
허리 높이까지 푸른 이끼에 뒤덮인 회화나무는 풍수지리상 화기를 막기 위해 심어졌다. 덕분에 미군 폭격으로 마을이 불바다가 될 때도 이씨 고가는 멀쩡했다고 한다. 이씨 고가에 맨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한 입향조는 태조 이성계 사위인 이재의 손자. 왕실과의 인연으로 인조 때 궁궐 목수가 내려와 직접 이씨 고가를 지었다고 한다. 집안에 뿌리를 내린 450년 생 회화나무는 인조로부터 하사받은 고목.
남사예담촌의 골목길 중 으뜸은 맨드라미 등 소박하면서도 청초한 가을꽃으로 단장한 최씨 고가의 골목길. 골목은 정확하게 ‘ㄱ’자로 꺾여 모서리에 바싹 붙으면 골목이 두 개로 보인다. 최씨 고가의 솟을대문 속에는 수령 230년의 최씨매를 비롯해 온갖 화초들이 수목원을 방불케 한다.
사양정사로 이어지는 골목은 투박한 질감과 부드러운 곡선이 돋보인다. 여느 골목보다 긴 데다 중간쯤에 위치한 폐가의 대문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홍시가 떨어져 뒹구는 골목은 정씨 집안의 문중회 장소로 쓰였던 사양정사의 솟을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정씨 집안의 입향조는 고려 충신 정몽주의 손자. 사양정사의 웅장한 지붕을 떠받치는 8개 기둥은 한 그루의 느티나무에서 나온 재목으로 백두산에서 벌목한 느티나무를 배로 싣고 온 후 산청 첩첩산골까지 육로를 통해 운반했다고 한다. 만석지기 집안이 아니면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사양정사에는 피부가 여인의 살결처럼 부드러운 배롱나무 한 그루가 있다. 이 배롱나무는 정씨 집안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상징하는 나무로 배롱나무에 꽃이 피면 곳간을 열어 마을 사람들에게 쌀을 나눠줬다고 한다. 배롱나무 꽃이 피는 7∼8월에 쌀이 떨어져 굶은 주민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양정사와 이웃한 정씨 집안의 종가인 선명당에는 뜰에 뿌리를 내린 홍단풍 한 그루가 눈길을 끈다. 이 홍단풍은 전국에 보급된 홍단풍의 어미나무로 봄에는 잎이 붉은색이지만 여름에는 녹색으로 물들고 가을에 다시 붉은색으로 변하는 귀한 나무. 요즘도 묘목상들이 홍단풍의 씨를 채집해갈 정도로 귀하신 몸이다.
남사예담촌에 귀한 나무들이 많은 이유는 만석지기와 천석지기들이 많은 부촌인데다 나무를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랐기 때문이라고. 선명당의 홍단풍도 정씨 집안의 선조들이 중국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사양정사의 솟을대문 앞에는 퇴락한 하씨 고택의 돌담 너머로 수령 600년이 넘은 감나무 한 그루가 주황색으로 익어가는 감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문정공 하연(1376∼1453)이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생각하며 심었다고 한다. 집안에는 하연의 조부이자 고려시대 문신인 원정공 하즙(1303∼1380)이 심었다는 수령 670년의 홍매화 한 그루가 고색창연한 기품을 자랑한다.
원정매로 불리는 홍매화는 몇 해 전 동사해 고사목이 됐지만 밑둥치에서 나온 가지가 살아남아 봄마다 홍매화를 피운다. 하씨 고택을 쓸쓸하게 지키는 당호 ‘원정구려(元正舊廬)’는 대원군의 친필로 ‘원정공이 살던 옛집’이라는 뜻. 서슬 퍼렇던 시절에 대원군이 원정매를 보기 위해 남사예담촌을 찾을 정도로 홍매화는 사랑을 받았다.
산청=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