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철희 (2) 맏며느리 아내의 ‘홀로 믿음’이 시어머니에까지
입력 2011-09-26 18:09
내가 기독교 신앙을 가졌을 때 친가는 물론 외가나 처가 누구도 예수 믿는 사람이 없었다. 불교와 유교가 혼합된 한국의 전형적인 전통 가정에서 부모님의 기대에 큰 거슬림 없이 자라났다. 그런데 아내가 느닷없이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나에겐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아내에겐 특별한 동기가 있었으리라고 짐작했다. 종교를 갖는다는 것이 마음의 안정과 도덕적인 건전함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아내의 교회 출석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둘째 아이를 낳고 산후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던 아내가 웃음을 찾고 활기차게 다니는 모습이 오히려 좋아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서 터졌다.
집안의 중심이 되어 제사를 맡아야 할 장손, 맏며느리가 교회를 나가다니! 부모님의 진노는 대단했다. 나는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때여서 매일 회사 일로 정신이 없었다. 어머니는 예수 믿는 며느리는 용납할 수 없다고 불호령을 내리셨다. 아내는 금방 교회 발걸음을 끊을 줄 알았는데 웬걸,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다. 오히려 새벽기도까지 다니며 더 열심을 냈다.
제사 때가 되면 어머니가 던져주는 마늘을 까면서 제사음식도 못 만지게 하는 구박을 받으면서도 아내는 굽히는 기색 하나 없이 씩씩하게 교회를 다녔다. 두 사람의 팽팽한 줄다리기에서 나는 고민했다. 결국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평소 MBA공부를 더 하고 싶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부모님과 떨어져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회사 직원들은 갑작스러운 결정에 의아해 했다. 어떻게 이 일을 그들에게 다 설명할 수 있었겠는가.
새벽기도에서 돌아온 아내는 어느 날 물었다. “여보, 버펄로라는 곳에 혹시 원서 넣었나요?” “음, 학비가 동부에서 제일 싸서 한 번 넣어 봤지. 만약 된다면 우리 형편에 그곳이 좋을 것 같은데, 너무 늦게 보내서 좀 힘들 것 같아.” “버펄로는 미네소타 주에 있나요?” “아니, 뉴욕 주에 있지. 그런데 왜 그래?”
당시 내 누님이 미네소타 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내는 내가 미네소타와 시카고 주변 학교에 원서를 낸 것으로 알고 있었다. 버펄로가 뉴욕 주에 있는지도 모르는 아내가 왜 그곳을 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내는 기왕 입학허가를 기다린다면 끝까지 기다려 보자고 우겼다. 6월에는 비자 신청을 해야 했기에 5월 말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아내는 금식까지 하고 있었다. 다른 몇 군데 학교에서는 입학허가가 왔지만 버펄로 뉴욕주립대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마침내 5월 30일 입학허가서가 도착했다. 아내의 얼굴은 일순간 밝아졌다.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아내에게 무슨 말씀을 하신 모양이다.
좋은 직장 그만두고 예수쟁이 마누라 데리고 유학 떠나는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 마음이 얼마나 섭섭하고 힘들었을까? 맏며느리의 신앙을 바꿔보려는 어머니의 끈질긴 시도를 뒤로하고 나는 초등학교 1학년과 유치원에 다니던 아들 둘을 데리고 1981년 버펄로로 향했다. 유학을 마치고 2년 뒤 귀국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마저 교회에 다니는 것에 더 큰 충격을 받으셨지만 결국 하나님 앞에 돌아오셨다.
“내가 절에 나가도 다 너희들 위해서였지 날 위해서였겠냐? 나도 너희들 따라 하나님 믿고 교회 나갈 거다. 그래서 지난번에 절에 가서 부처님께 죄송하다고 마지막 인사하고 왔다.”
어머니는 예수를 영접한 지 10년 만에 평안한 모습으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간암으로 투병하시면서도 자녀들을 위해 밤마다 기도하시던 모습을 생각하면 참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리=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