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나시현 고후교회 홍창희 목사 “소도시서 교회개척 15년 하나님의 선물 ‘韓流’ 큰 도움 됐죠”

입력 2011-09-23 18:12


도쿄 하네다공항에서

차로 3시간 거리의 고후(甲府)시는

야마나시현의 현도로

인구 20여만명의 소도시다

고후교회는

이 도시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한국인 선교사 개척교회로

올해로 개척 15년째다

교인은 모두 80여명

2002년에 지금의 성전을 구입해

번듯한 교회가 됐다

한국이 아닌 일본이라는

환경을 감안했을 때

고후교회의 성장은 ‘기적’ 외엔

달리 설명할 말이 없다

일본 내 한류 열풍은 여전했다. 연예인들에 대한 인기도 시들 줄 몰랐고, 김치를 비롯한 한국 음식과 한국어 배우기도 한창이었다. 그 열풍은 일본 선교의 지형도까지 바꿔놓고 있었다.

고후교회 홍창희(47) 담임목사는 “한국 목사가 일본에서 건물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며 “아무것도 없었다. 100%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했다.

불가능을 가능케 한 매개 역할은 ‘한류 열풍’이다. 1999년, 한류 열풍이 일본으로 불어 닥치기 직전이었다. 홍 목사는 아픈 아이를 데리고 소아과로 갔다. 이렇게 몇 번 만나다 보니 그 의사는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데가 없느냐”고 물어왔다. 매주 토요일 고후교회의 한글교실은 이렇게 시작됐다. 두어 해를 넘기면서 한류 열풍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하자 한글 수강생도 20여명으로 늘어났다. 한국인 강사와 일본인 수강생 사이에도 꽤 깊은 신뢰관계가 쌓였다. 경매로 나온 건물 얘기도 나오게 됐고, 그 의사는 선뜻 5억원이 넘는 돈을 홍 목사에게 빌려줬다. 그리고 2002년 7월, 지금의 고후교회 건물을 마련할 수 있었다.

복음 전도의 문도 한류열풍을 타고 활짝 열렸다. 1년에 2∼3차례 여는 김치교실에는 평균 50∼60명의 일본인들이 참여한다. 일본 불교 승려의 부인들까지 올 정도다. 이들은 김치가 절여지는 동안 한국어 찬양도 배우고, 예배도 드리면서 복음을 나눈다. 사역의 특성상 김치교실은 김부희(46) 사모의 몫이다. 김치교실은 이 지역에 김치가 출하되는 10월에 주로 열린다. 또 1년에 한 번 경로잔치도 연다. 이때면 김 사모와 교인들이 한복을 입고 서툰 부채춤을 선보인다. 김 사모는 “학교 다닐 때도 부채춤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데 여기 와서 인터넷으로 배웠다”며 “주민의 기대가 워낙 커서 외면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홍 목사는 올 초부터 마을 반장(조장)으로 일하고 있다. 10여 가구를 대상으로 시에서 발간하는 회람을 돌리고 회비를 받아내는 게 주된 역할이지만 그들에게 말을 걸고, 관계를 맺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일본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관계를 맺는 게 우선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홍 목사는 야마나시현 국제교류협회와 공립 간호전문학교에서 한국어 강사로 맹활약하고 있다.

좋은 관계는 풍성한 전도의 결실로 맺혔다. 한 해 평균 12명의 일본인이 한인 교회인 고후교회에서 세례를 받는다. 개척 후 지금까지 100여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2007년엔 종교 단체로는 드물게 야마나시현의 종교법인으로 공식 등록돼 보호를 받고 있다.

홍 목사는 1991년 유학생으로 도쿄에 왔다가 소명을 받고 일본 선교에 헌신했다. 그동안 신문·음식 배달, 트럭 운전 등 힘든 아르바이트는 안 해 본 게 없을 정도다. 가난과 함께 교회 분열을 세 차례나 겪으면서 ‘난 목회 체질이 아니다’며 다 그만두고 한국에 돌아갈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인고의 세월은 그에게 오히려 약이 됐다. 신뢰와 인내만이 굳게 닫힌 일본 선교의 빗장을 열 수 있음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특히 한류열풍은 ‘초고속’ 일본 선교를 가능케 했다.

“일본인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한류 열풍 이전과 이후 확연히 다릅니다. 한류 열풍은 하나님께서 일본선교를 위해 보내주신 첫 번째이자 마지막 찬스라고 생각합니다.”

고후=글·사진 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