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종석 (13·끝) 몰도바의 눈물… 내 평생의 의료선교 원천돼

입력 2011-09-22 17:52


고등학교 시절 의과대학을 지원할 때 하나님에 대한 외경심을 품고 아프리카 람바르네에서 흑인 나환자를 진료하며 일생을 바쳤던 슈바이처 박사의 봉사 정신이 늘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었다.

1997년 김성관 목사가 충현교회 위임목사로 부임한 후 선교정책이 장기·거점 선교에서 단기선교로 바뀌게 되었다. 98년 8월이었다. 일단 병원 일을 접어두고 지금은 해외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는 송요한 목사님의 지도로, 팀원 10명을 이끌고 동유럽의 작은 나라, 우리나라의 강원도만한 크기인 몰도바의 수도 키시네프로 향했다. 석양 무렵에 내린 몰도바의 수도는 에덴동산을 연상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겉모습과 달리 이 나라는 불행한 과거를 안고 있었다. 인접한 루마니아로부터 늘 시달림을 받았고, 소련 공산치하에서 벗어났지만 이념갈등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내전으로 죽어갔다. 이 도시 사람들 대부분은 옆구리에 수술자국이 있었다.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생계수단으로 신장 하나를 떼어 팔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슬프고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우리 선교팀은 우선 학교 교실을 빌렸다. 동네 사람들이 진료를 받기 위해 한 줄로 길게 서 있으면 그 틈을 타서 전도를 하는 것이다. 이 나라는 사회주의국가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전도를 할 수는 없었다. 여행객을 가장해 입국했기 때문에 나름대로의 보안도 철저해야 했다. 의료를 통한 전도사역, 심방사역, 노방전도, 찬양사역 형식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지금도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은 모든 사역을 끝마치고 귀국하려 하는 아침, 경건회 시간을 가진 자리에서다. 찬양을 부르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께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술주정꾼인 남편이 우리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감사하고 감격해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출발 예배를 다 마치고 난 다음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보안요원이 오더니 우리가 입국할 때 보안대에서 정식으로 입국허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판을 받아 감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비행기 출발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속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팀장으로서 무거운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묘책이 없을까’ 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네 이놈들아 이럴 수가 있느냐. 이역만리 한국 땅에서 너희들의 병을 치료해주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는데 떠날 때에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냐’ 하는 괘씸한 생각도 들었다. 책임자를 불러서 한번 배짱을 부리기로 했다.

“나는 의사다. 10일 동안 수많은 환자의 병을 고쳐 주었는데, 감사하다는 말은 못할망정 이럴 수가 있느냐.” 그간 정이 들었던 주민들이 웅성거리면서 보안요원을 나무라는 소리가 들렸다. 보안요원은 멋쩍었는지 약식재판을 받는 형식으로 이 사건을 끝내자고 했다. 우리는 무사히 귀국길에 올랐다.

지금 생각하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보안요원 앞에서 감히 그런 말을 한 것이다. 복음에는 권위와 능력과 은혜가 있는 줄을 그후에야 깨닫게 되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앞으로도 의술을 매개로 복음 전도하는 일을 계속하고 싶다. 올해부터는 내가 속한 처소에서 성경을 나눠주는 일도 하고 있다. 또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전문 갑상선클리닉’이 생기는 것이다.

정리=김성원 기자 kernel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