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정의 사진] 사라진 골목의 온기
입력 2011-09-22 18:12
2년 전 인도네시아 순방 중이던 이명박 대통령이 은퇴하면 사진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사진가들의 술자리 푸념은 이랬다. 연예인도 사진집 내고, 최고위 경영자도 사진전 열고, 전직 대통령까지 사진가로 활동하면 아마추어와 전업 작가는 어떻게 구별하나. 사진가를 뺀 전 국민의 취미가 사진인 시대니 취미가 사진이 아닌 사람만 모아 놓으면 된다는 것으로 답이 모아졌다.
모두가 음악 감상과 독서를 취미로 꼽던 시절을 지나 여가문화가 발달하면서 등산과 같은 활동적인 취미가 대세더니 이제는 사진이 꽤 인기몰이를 한다. 굳이 배우지 않아도 주저 없이 할 줄 안다고 말할 수 있고 실력 검증의 기준도 모호하다. 가격이야 천차만별이지만 일단 카메라 한 대만 있으면 증거품으로서는 충분하다. 이 대통령도 현대건설 시절 첫 3개월 월급을 몽땅 털어 라이카 카메라를 장만한 일화가 있다. 사진은 등산 못지않게 활동적으로 보이면서도 좀 더 도시적인 느낌을 풍길 수 있다. 더불어 촬영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자연, 생태, 여행 등 다양한 관심 분야를 가진 것처럼 연출할 수도 있다.
골목은 이런 사진 애호가들의 단골 촬영지다. 일단 어렵지 않게 찾아갈 수 있고, 시쳇말로 ‘화면발’도 괜찮고 적당히 운치도 있다. 이렇게 찍은 사진들이 블로그를 통해 유통되면서 가난과 저개발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골목길이 벽화로 새 단장을 하거나 추억의 명소처럼 대접받기도 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진짜 골목은 이곳을 찾아오는 카메라의 수가 훨씬 적던 시절에 재개발과 함께 이미 사라졌다.
얼마 전 눈빛출판사에서 나온 김기찬의 ‘골목안 풍경’은 이 사라진 장소에 대한 걸쭉한 서사다. 그는 시골의 가난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온 이들의 삶이 녹아든 중림동, 도화동, 행촌동 일대 골목골목을 누비며 1968년부터 무려 30년 동안이나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이 무렵 골목은 가난한 이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마당이었다. 평상 하나면 사랑방으로 변하고,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공부방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목욕탕이자 이발소이기도 했다. 골목이 공유한 것은 공간만이 아니었다. 그 골목을 타고 흐르는 소리들은 아무개네의 노름빚이며 바람 핀 사연까지도 공공연한 비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작가가 남긴 500여장의 사진은 20세기 후반 서울에서의 골목 쓰임새에 대한 사례 연구라 할 만큼 풍성한 기록을 담고 있다. 그 시절만의 복식, 주거, 놀이 등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 속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남루하지만 당당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 이번 사진집은 2005년 타계한 작가가 그동안 내놓은 6권의 사진집과 34점의 미발표작을 한데 모은 전집이다. 작가는 88올림픽을 기점으로 아파트에 떠밀려 사라진 골목의 주인공들을 아쉬워하며, 사진 속 주인공들을 수소문해 재촬영하기도 했다.
그의 사진 속에는 최근의 블로그 골목 사진에는 없는 사람 냄새가 있다. 성미 급하고 깐깐하기로 유명했던 작가의 성미 그대로다. 어떤 은유도 없이 담백한 그 사진은 역설적으로 뉴타운에 대한 과거의 암시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진집 밖으로 골목의 온기가 가득하다.
<사진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