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정의 바둑이야기] 기사들의 휘호
입력 2011-09-21 21:35
바둑기사들이 대국하는 모습을 화면이나 사진을 통해 보다 보면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그것은 휘호가 담긴 부채이다. 기사들의 기호에 따라 손수건, 지압기 등을 가지고 대국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다수 기사들은 부채 하나씩은 가지고 있다. 그 부채에는 저마다 선호하는 글귀의 휘호가 담겨 있다.
이 휘호부채는 일본이 역사가 깊다. ‘살아있는 기성’으로 불리는 오청원 9단은 중용(中庸) 33장에 나오는 ‘암연이일장(闇然而日章:군자의 도는 어두워 보이나 날로 빛난다)’을 인용했고, 1950년대 일본 최고의 본인방 타이틀 9연패를 차지했던 고(故) 다카카와 가쿠 9단은 ‘회남자(淮南子)’의 글 가운데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다)’을 인용해 자신의 인생과 바둑 철학을 나타냈다. 또 후지사와 슈코 9단은 ‘대도무문(大道無門)’, 사카다 에이오 9단은 ‘유현(幽玄)’, 조치훈 9단은 ‘소심(素心)’, 다케미야 마사키 9단은 ‘우주류(宇宙流)’ 등 자신이 좋아하는 글귀를 담은 부채를 손에 쥐고 다니며 수양했다.
우리나라는 90년대 후반부터 조남철 9단을 시작으로 휘호부채가 만들어졌다. ‘한국바둑계의 대부’로 불리는 고 조남철 9단은 ‘수담망우(手談忘憂:바둑으로 근심을 잊는다)’, 바둑황제 조훈현 9단은 ‘무심(無心:마음을 비운다)’, 유창혁 9단은 ‘우일신(又日新:날마다 새로워진다)’, 이창호 9단은 ‘성의(誠意:정성스러운 뜻)’라는 휘호를 썼다.
이 짧은 글귀 안에는 신기하게도 그 기사들의 성품과 기풍이 녹아 있다. 아직까지 한국기사들도 부채나 바둑판에 휘호를 쓸 때는 한자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오랜 시간 한·중·일 삼국이 주도해온 바둑이기에 공통으로 쓸 수 있는 한자를 선호한 때문이다.
하지만 개성 있는 휘호를 선보이는 기사들도 있다. 일본의 장쉬 9단은 자신의 이름 옆에 묘수풀이를 그려 넣었고, 한국 ‘창작묘수풀이의 대가’ 김수장 9단은 ‘인(仁)’의 글씨 옆에 사람 인(人)자를 형상하는 묘수풀이를 창작해서 담아냈다. 또 최근 대만의 미녀 프로기사로 유명한 헤이자자 초단은 남자기사들과 차별된 여자시합 규정에 반대하며 ‘항의성별기시(抗議性別岐視)’란 글귀를 적은 부채를 들고 대국에 임해 화제가 되고 있다. 자기표현이 확실한 신세대다운 모습이다.
이렇게 기사들의 정신이 담겨 있는 부채는 바둑 팬 사이에서 최고 인기다. 바둑행사에 유명기사들이 오면 부채에 그들의 사인을 담는 풍경은 바둑계에서만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이런 모습이 최근 서구 바둑계에도 영향을 미쳐 책, 부채, 티셔츠에 한자로 된 문구들을 새겨 소장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기사의 바둑기풍을 떠나 그의 생각까지도 닮고 싶은 마음의 표현일 것이다.
<프로 2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