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기 환우와 평안의 숲길 걷다… 오대산 ‘사랑이 있는 마을’ 안도현 목사
입력 2011-09-21 18:11
강원도 홍천 오대산 끝자락에 있는 ‘사랑이 있는 마을’은 질병으로 생의 마지막 시간이 임박한 사람들이 머물며 영적 평안을 누리는 작은집이다. 2004년부터 이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환우들과 더불어 지내는 안도현(58·일산아름다운교회) 목사는 죽음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삶의 여행을 끝낸 나그네가 집으로 돌아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말한다.
“죽음과 삶의 문제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죽음의 참된 의미를 알아야 삶의 아름다움도 발견되고 목표도 선하게 세워집니다.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삶의 질을 보다 풍성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사랑이 있는 마을’엔 5명 정도가 3∼4개월 머물 수 있다. 그동안 많은 사람이 다녀갔지만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회비도 없다. 형편이 좋고 여건이 되는 분들은 요양원에 가게 하고, 형편이 어려운 분만 받아들인다. 재정 운영은 일산아름다운교회가 담당한다.
하루를 살라
그는 이곳에서 자신이 하는 일은 대단치 않다고 손사래를 친다. 그저 환우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먹고, 함께 지내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정리해야 할 것을 스스로 정리하고, 마음을 비우고, 죽음을 맞을 준비를 한다고 했다.
그는 부활절마다 교회 주보에 자신의 유언장을 공개한다. 오늘이 마지막날이란 생각에 적을 때 울컥 눈물이 나기도 한다. 유언장 내용은 성도들에게 감사하고 미안하다는 것, 자신이 쓰러져도 절대 병원으로 데려가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자신이 쓰러진 시간이 하나님이 주신 마지막 시간임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하루를 삽니다. 내일 깨어나면 감사히 여기고 또 하루를 살 겁니다.”
네 번의 죽음
1999년 3월 건강검진을 통해 청천벽력 같은 폐암말기 선고를 받았다. 의사는 9㎝ 크기의 악성종양은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일산 풍동에 아름다운교회를 세우고 목회도 어느 정도 안정되고 점차 부흥하고 있을 때였다. 중요한 시기에 암 선고라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수술 날짜는 잡았지만 생사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부정과 분노를 경험하고 1주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어요. 그러면서 평안이 오고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마음이 바뀌었지요.”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가족에게 유언을 남겼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맡기신 일을 하리라 결심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심방을 했다. 병원에 시신기증 서약을 하고 수술을 위해 신촌세브란스병원을 찾았다. 그런데 수술 전 다시 촬영한 사진에서 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오진이 아니냐며 항의했다. 의사는 “사람은 거짓말을 해도 CT 기계는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나님께 그토록 치유해 달라고 간구해 놓고 하나님이 치유해 주셨는데도 믿지 못한 제가 정말 한심해 울면서 회개했어요.”
그때부터 덤의 인생이었다. 죽음이 결코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란 사실을 인식했다.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목회자로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깨달았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삶이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었다.
사실 그는 네 번의 죽음을 직면한 경험이 있다. 1970년 전주 신흥고등학교 입학식 날, 자취방에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쓰러졌다. 다행히 이웃에게 발견돼 무사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 감사해 그후 5년 동안 한센병 환자들의 자녀(미감아)들이 수용돼 있는 보육원에서 봉사했다. “연탄가스 중독 말고도 헌혈 부작용과 과로로 쓰러져 죽음의 문턱까지 간 일이 있었어요. 무엇보다 제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은 폐암말기 선고를 받은 것이었죠.”
상처받은 치유자
그는 상처받은 치유자다. 암으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보았다. 누구보다도 암 환자들의 고통을 잘 안다. 그는 말기 환우들에게 가족과의 화해와 용서를 요청한다. 용서는 타인이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일이다. 용서를 통해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얻은 이들은 건강을 회복하기도 한다.
‘사랑이 있는 마을’에선 하루 세 번 예배가 있지만 원하는 사람만 참여하게 한다.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고 환우들이 마음의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린다. 같이 가곡이나 동요를 부른다. 환자들을 자동차에 태워 넓은 바다도 보여주고, 같이 노래방에 가기도 한다.
“이곳에 머물다 떠나실 때 웃으면서 가는 모습을 많이 봐요. 죽음은 육신과 영혼의 결별일 뿐 끝은 아니니까요. 기쁨과 구원의 확신이 있는 임종의 모습을 보면서 가족들의 슬픔이 덜어지고 더 큰 열매들이 맺어져요.”
이발사였던 K씨(62)가 그랬다. 폐암말기 선고를 받고 이곳에 온 그는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았습니다. 3만원 이상 허투루 써 본 적이 없습니다. 그 돈으로 과일이라도 사서 가족과 맛나게 먹는 것이 훨씬 좋으니까요. 그런데 저 같은 사람에게 왜 이런 병이 생긴 거죠”라고 물었다.
안 목사는 납득할 수 있는 답을 줄 수 없었다. 그저 하나님을 소개하고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며 죽음 너머에 하나님 나라가 있다고만 전했다. K씨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암에 대한 두려움을 이겨냈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던 그는 쌓여 있는 응어리를 풀기라도 하듯 무려 5시간 동안 큰소리로 찬양하기도 했다.
안 목사는 영혼이 육체에서 벗어나는 순간은 끼었던 장갑을 벗는 순간만큼 짧다고 했다. “그가 소천하기 전 제 손을 한동안 놓지 않고 ‘하나님 밖에 없다’는 고백을 한 뒤 눈을 감았어요. 이제 전 그의 질문에 답할 수 있어요. 그는 가족의 온전한 구원을 위한 한 알의 밀알이었다고요.”
준비된 동역자
‘사랑이 있는 마을’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박인희(54) 집사다. 박 집사는 2003년 오대산에 통나무로 집을 짓고 동생(2000년 암으로 소천)과 같이 운영하던 인터넷 카페 이름 ‘사랑이 있는 마을’이란 팻말을 달았다. 박 집사는 가난한 말기암 환자를 돕고 싶었다.
그리고 암 환자를 잘 이해할 수 있고 그들의 영성을 지도할 수 있는 동역자를 보내 달라고 기도했다. 그 무렵 오대산 인근에서 요양하던 안 목사를 만나게 됐다. 두 사람은 준비된 동역자였다. 이들은 오직 말기 환자들의 영혼 구원에 초점을 맞췄다. 육신의 죽음이 임박하면 소망의 죽음을 맞을 수 있도록 영혼을 깨우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박 집사는 도라지 참나물 곰취 두릅 질경이 등 산나물과 농사지은 무공해 음식들을 환우들에게 먹이고 편안한 잠자리를 준비해줬다. 고통이 심한 환자에겐 밤새 기도하며 팔다리를 주물러줬다.
안 목사는 ‘사랑이 있는 마을’을 메인스타디움에 비유했다. “마라톤은 완주에 의미를 두는 경기입니다. 메인스타디움의 관중은 가장 늦게 들어온 선수에게도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마지막 결승점에 도달할 때까지 환호하며 격려해 줍니다. 사랑이 있는 마을의 사명은 경기장의 관중처럼 선수들이 테이프를 끊는 순간까지 격려하며 영원한 본향에 무사히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일입니다.”
사랑의 주유소
안 목사는 이곳이 ‘사랑의 주유소’가 되길 바란다. 사랑을 주유해서 쓰다 고갈되면 다시 오는 곳, 영적으로 재충전이 필요한 사람들이 와서 영성을 회복하는 곳이 되길 소망한다.
최근 방문한 ‘사랑이 있는 마을’의 시계는 빨리 가는듯 했다. 산책길에 눈길을 끄는 팻말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기 전에 하는 세 가지 후회. 첫째는 좀 더 참을 걸, 둘째는 좀 더 베풀 걸, 셋째는 좀 더 귀한 일을 할 걸.’ 발걸음은 더 느려진다.
마을 뒷산엔 자연항암제인 방선균과 피톤치드가 나오는 소나무 숲이 있다. 조금 더 걸어가면 연무에 싸인 칡소폭포와 그 물줄기를 거스르기 위해 뛰어오르는 열목어들을 볼 수 있다. 마을 초입엔 알칼리 자연수가 솟아나는 샘물이 있다. 그곳이 천국이 아닐까란 생각을 해봤다.
홍천=글 이지현 기자·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