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임항] 사상최대의 공짜 점심
입력 2011-09-19 17:46
지난해 국내 단일 사업장 가운데 전기를 가장 많이 사용한 곳은 현대제철 당진공장이었다. 당진제철소는 그해 3039억원의 전기요금을 냈다. 그러나 당진제철소가 일본에서 공장을 돌렸다면 이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약 8083억원의 전기료를 내야 했을 것으로 분석됐다. 우리나라 산업용 전기요금은 이웃 일본의 37%에 불과하다. 에너지경제연구원 박광수 연구위원은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에서 국내 산업용 전기요금은 2010년 기준 t당 672.1달러인 반면 일본은 1795.3달러라고 밝혔다. 또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서도 각각 47%, 51%에 지나지 않는다.
국회 지식경제위 소속 민주당 강창일 의원이 지난 16일 공개한 한국전력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산업용 전기요금 평균은 ㎾/h당 76원으로 총괄원가 96원, 평균 판매단가 87원보다 훨씬 더 쌌다. 반면 주택용은 ㎾/h당 130.72원, 일반(상업용) 요금은 111.16원, 교육용은 92.80원이었다. 게다가 전기사용량 상위 10개 사업체는 산업용 평균 단가보다 9원 싼 67원을 지불했다. 철강·정유 등 에너지 다소비업종의 특성상 24시간 가동하면서 단가가 더 싼 심야 전기를 훨씬 더 많이 썼기 때문이다. 한전이 상위 10위 업체에 총괄원가만 적용했더라도 7485억원을 더 받을 수 있었다고 강 의원은 설명했다.
이런 간접 지원금은 정경유착의 일회성 특혜를 제외하면 한 기업이나 업종에 대한 사상 최대의 ‘공짜 점심’이라고 해도 반박하기 어려울 것 같다. 누적적자가 7조원을 돌파한 한전은 매년 적자의 일부를 국민들의 세금으로 해소하고 있다. 그런데도 정부는 물가인상 부담을 이유로 전기료 소폭 인상과 같은 ‘미세조정’으로 일관하고 있다.
국민들의 전기 과소비를 탓하기에 앞서 정부의 편파적 가격정책이 시장에 왜곡된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게 근본적 문제다. 고급 에너지인 전기를 석유 제품 등 다른 에너지보다 계속 싸게 공급하겠다는 신호 말이다. 국내 등유와 도시가스 요금은 2002년 대비 2008년에 각각 123.6%와 28.0% 인상된 반면 전기요금은 5.8% 오르는 데 그쳤다. 그러다 보니 지난 십수 년간 우리나라의 연간 전기사용 증가율은 연평균 경제성장률의 두 배에 이른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한국의 1인당 전력소비량은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나라의 두 배, 세 배에 이르는 독일, 덴마크를 벌써 추월한 데 이어 2009년 일본마저 앞질렀다.
전력시장의 왜곡은 1980년대 전두환 정권 때 본격화됐다. 원자력발전소가 잇따라 완공되면서 전기가 남아돌자 정부는 80년대에만 전기요금을 10차례나 인하했다. 물가안정이라는 치적 뒤에는 전기낭비 관행이 고착화되고 있었다.
이제는 원전의 역할을 재검토할 때다. 원전 비중의 확대는 신규 부지 확보가 매우 어려울뿐더러 전력수급 효율화 측면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원전은 24시간 가동해야 하고 휴지 상태에서 재가동하는 데 24시간이 걸린다. 원전 의존도가 높을 경우 이번 정전사태와 같은 비상시에 기동성 있는 전력공급 대응이 어렵다. 원자력발전 비중이 80%로 가장 높은 프랑스의 경우 국내 전력 공급난을 자주 겪기 때문에 독일 이탈리아 등 이웃나라로부터 전력을 수입하는 실정이다.
부문별 전기요금의 격차를 줄이고 전반적 요금수준을 대폭 올려야 한다. 이해관계자들의 반발과 로비를 제어하려면, 예컨대 5년간에 걸친 요금인상 목표를 제시하고 매년 자동 인상을 법에 명문화하는 등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전력수급의 위기는 요금인상을 통한 수요억제, 그리고 느리더라도 재생에너지의 비중 확대를 대처 방향의 큰 줄기로 잡아야 한다.
임항 환경전문기자 hngl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