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진정 원하는 건 ‘사랑’… 황혼녘 여자들의 이야기 연극 ‘아름다운 꿈 깨어나서’
입력 2011-09-18 17:25
“이 나이에 남들은 신나게 여행 다니고 놀면서 돈 쓰고 다니는데 난 뭐니? 우리 친구 중에 남편 살아있는 사람, 나밖에 없어. 그게 무슨 소린지 몰라서 물어?”
첫 장면. 주인공 중 하나인 옥란이 딸과 통화하며 내뱉는 대사에 관객들은 실소를 금치 못한다. 그리고 옥란의 두 과부 친구 재분과 혜숙이 잇따라 등장한다. 세 여자는 환갑을 넘어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다. 여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며 깔깔대는 와중에 친구 앞에서 애써 세련되게 꾸민 옷차림이 이들의 지난 삶과 현재를 말해준다.
지난해 ‘한번만 더 사랑할 수 있다면’으로 노년 남자들의 허무를 파헤쳤던 윤대성 작가·임영웅 연출은 이번엔 황혼녘의 여자들에 초점을 맞췄다. 세 주인공은 평범하게 살아왔던 여자들. 그런데 옥란의 남편은 파킨슨씨 병으로 누워 있고 재분의 남편은 바람피우는 아내를 목도한 충격으로 자살했으며 혜숙의 남편은 교통사고로 죽었다. 인생의 전부를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온 세 여인은 결혼생활의 끝자락에서야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뒤늦게 묻는다. 나는 과연 행복했는가, 존중받고 있었는가, 성(姓)의 주체였는가에 대해서. 불행했다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 특히 나이든 여자에 대한 성찰은 영화와 드라마 등 대중문화에서 어느덧 흔해진 소재. 그러나 이 작품은 주제에 접근해가는 방식에서 좀 더 문학적이다. 이들의 생각과 행위, 과거가 대체로 대사로 길게 묘사되고, 시가 인용된다. 극 중 시인으로 등장하는 한식의 입을 빌려 등장하는 이수인 시인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미워할수록 사랑으로 다가오고/ 잊으려 하면 그리움으로 머무는/ 가까이 가면 저만치 가고/ 손잡을 듯 다가와서 되돌아서는/ 당신은 누구신가요” 바람피운 여자와 늙은 남편의 병간호를 하는 여자가 공감하는 정서는 단 하나 ‘사랑’이다. 암전과 장면 전환은 여러 차례 있지만 무대는 요란한 변화 없이 침착함을 유지한다.
그러니 연극은 따뜻하지만 다소 진부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진부한 주제가 설득력을 갖는 건 인간성의 통찰에 성공했을 때인데, 이 작품 역시 그렇다. ‘남편 살아 있는 사람 나밖에 없다’며 불평했던 옥란이 끝부분에 와서 남편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토로하는 것은 그녀 자신의 성장임과 동시에 모든 사람이 갖고 있는 진심일 터. 비발디의 ‘사계’, 쇼팽의 ‘야상곡’ 등 인물들의 감정 변화에 따라 용솟음치거나 흘러내리는 음악 또한 매번 정곡을 찌른다.
손봉숙 이현순 지자혜 윤여성 박윤석 출연, 15일부터 다음달 9일까지 서울 서교동 산울림소극장에서 공연 중이다. 만 16세 이상 관람가. 산울림소극장 개관 26주년 기념 공연이기도 하다.
양진영 기자 hans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