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코너-정원교] 창춘에서 보낸 3일
입력 2011-09-13 17:39
지난 6일 중국 지린(吉林)성 창춘(長春) 국제회의전시센터는 무척 붐볐다. 이날 개막된 제7회 동북아 투자무역박람회에 참가한 인사들과 일반인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였다. 개막식장에서는 제복 차림의 악대가 쉴 새 없이 경쾌한 음악을 연주했고 치파오(旗袍)를 차려입은 젊은 여성들은 붉은 카펫 양쪽으로 늘어서 손님을 맞고 있었다.
개막식장에 들어서기 전 눈에 들어온 낯익은 광경 하나. 하늘색 티셔츠로 통일한 학생들이 귀빈들을 향해 울긋불긋한 조화를 열심히 흔들고 있었다. ‘어 이거 어디서 많이 봤던 장면인데….’ TV에서 심심치 않게 봤던 평양의 모습이 떠오르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중국에서도 원래 환영의 뜻으로 꽃을 흔들곤 하는데 왜 그렇게 연상됐을까.
그 뒤 개막식장에서 동료 기자들과 가벼운 얘기를 나누는데 악대가 아리랑을 연주하는 게 아닌가. 이에 누군가가 “박람회 참가국 민요를 연주하는가보다”라고 하자 다른 일행은 “창춘에 조선족이 많이 사는 만큼 지금은 중국인인 그들 민요를 연주하는 것일 뿐”이라고 맞받았다. 다른 참가국 민요도 연주되는지 알아보면 금방 결론이 날 일이었지만 그렇게까지 호기심이 왕성한 사람은 없었다.
박람회에는 한국은 물론 북한, 일본, 러시아, 몽골, 대만, 홍콩 등이 참가했다. 그런데 박람회장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내내 뭔가가 머리를 짓누르고 있다는 느낌 때문에 개운치 못했다. 꽃 흔드는 장면, 아리랑, 지린성, 조선족…. ‘아 북한이었구나.’ 북한이라는 존재가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는 걸 마침내 깨달았다.
이에 앞선 4일에는 창춘 샹그리라 호텔에서 한·중·일 언론인 원탁 포럼이 열렸다. 30여개 언론사의 중견언론인 80여명이 참가한 포럼에서는 동북아시아 지역 경제협력 방안, 한·중·일 3국 협력과 언론의 역할 등을 놓고 주제발표와 토론이 진행됐다.
참가자들은 “한·중·일 3국 GDP 규모가 전 세계의 5분의 1을 차지할 만큼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면서 “동북아 지역에서 개방과 경쟁을 촉진함으로써 선순환 경제협력 구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3국간 경제협력은 제로섬이 아니라 윈윈 게임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고 언론분야 상호 협력이 미흡했다는 반성도 나왔다.
하지만 이러한 말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린성 성도(省都) 창춘은 어떤 곳인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지난해 8월 방중했을 당시 후진타오(胡錦濤) 주석과 회담한 난후빈관(南湖賓館)이 있는 도시 아니던가. 일본 강점기 때는 선열들의 독립운동 무대이기도 했다. 지금은 수많은 조선족의 생활터전이다.
일본이 1932년 세웠던 괴뢰정부 만주국의 황제 푸이(溥儀)가 머물렀던 위만황궁(僞滿皇宮)이 있는 곳도 여기다. 창춘과 지린, 투먼장(圖們江)유역을 잇는 ‘창지투 개발계획’ 시발점도 이곳이다. 중국으로선 동북지방을 개발하는 동시에 북한 나진항 사용권 확보 차원에서 이 계획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창춘은 이처럼 한·중·일 사이에 역사적 명암이 교차했던 장(場)이자 지금도 이해가 엇갈리는 곳이다. 그런 점에서 3국간 협력 강화는 동북아 평화구조 정착을 도외시하고는 생각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는 자연스럽게 북한 문제가 포함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참석자들은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애써 언급을 피하는 모습이었다. 마침내 포럼 막바지에 한국 측 참가자가 말했다. 동북아 경제협력을 얘기하려면 이 지역 평화구조에 대해서도 진지한 토론이 이뤄져야 한다고. 북한을 좀 더 현실 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베이징=정원교 특파원 wkcho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