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서민정] 부모님의 사진첩

입력 2011-09-13 17:50


나의 첫 19금(禁) 성인화보 경험은 중학교 때 아버지의 책장에서였다. 쌓여있는 옛 앨범들 사이에서 자개로 만든 고풍스러운 사진첩을 꺼내 첫 장을 넘기자 나타난 건, 속이 훤히 비치는 아오자이를 입은 베트남 여자였다.

고깔 모양의 베트남 전통모자인 논라만 쓰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 검은 눈동자의 아가씨부터 비키니를 입은 금발의 아가씨까지 외국 여인의 사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작품처럼 보일 만큼 흑백사진으로 정갈하게 찍힌 것들이었으나 그때는 입 밖에 꺼내선 안 될 비밀을 훔쳐본 듯 놀란 마음을 추스를 수 없었다. 물론 끝까지 다 보긴 했으나 여하튼 그 이후로 다시는 옛 앨범을 들추지 않았다.

이번 추석 연휴, 부모님 댁에서 나른한 시간을 보내다 문득 그 ‘첫 경험’이 떠올라 네댓 개의 앨범을 꺼내놓고 보다가 툭 떨어진 한 장의 사진을 보곤 적잖이 당황했다. 그 속엔 젊은 전태일이 웃고 있었고 그보다 더 젊은 나의 어머니가 있었다. 친구 일하는 곳에 놀러 갔다가 얼결에 찍은 단체사진이란다.

나는 앨범들을 처음부터 다시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기엔 젊은 시절의 부모님 얼굴만 있는 게 아니었다. 베트남 메콩강 어느 부근에서 죽음의 공포를 애써 누르고 있는 듯한 표정의 한국군 모습이 있었고, 1960년대 말 서울 명동 거리와 청계천이 있었고, 고 육영수 여사의 장례행렬이 있었다. 그 시대를 거쳐 왔으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건만 나에겐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생활인으로서의 아버지와 어머니만 있었지 역사 속에서 생을 이어온 그와 그녀를 느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자리에선가 소설가 김영하는 누구나 소설책 한 권은 쓸 만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일흔을 넘긴 이름 없는 필부 20명이 자기 삶을 구술한 것으로만 엮은 ‘20세기 한국 민중의 구술 자서전’도 출간된 바 있다. 이보다 더욱더 기억에 남는 소식이 있다. 지난해 여러 매체에도 소개됐던 고교 문학동아리의 동네어르신 자서전 쓰기이다.

대전 동대전고 김수진 교사와 학생들이 빠듯한 학교생활 중에 6개월 간 할머니,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여 5권의 자서전을 완성해 출판기념회도 열었다. 앞을 못 보는 어느 어르신은 자서전 선물 소식을 들은 뒤 수소문 끝에 동대전고에 연락을 했고 구술 녹음테이프를 우편으로 보낸 후 넉 달 만에 500쪽에 가까운 자서전을 갖게 되셨다. 이 학교의 어르신 자서전 써드리기 활동은 올해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에게는 승자 논리로 쓴 역사에서는 드러나지 않을 무수히 많은 ‘작은 역사들’이 있다. 역사란 말이 거창하다면 누구에게나 경청할 만한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해도 좋겠다. 타인에게 말 걸기,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기는 바로 여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이번 추석에는 달 대신 낡은 흑백사진을 보며 새삼스럽게 되뇌어 보았다. “누구에게나 역사는 있다!”

서민정 문화예술교육진흥원국제홍보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