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형의 교회이야기] 아버지 마음
입력 2011-09-06 17:53
얼마 전 쓰나미 피해를 입은 일본 센다이와 인근 지역을 다녀온 적이 있었다. 신의 의지에 반한 인간 의지의 연약함을 통절히 느끼게 한 장소였다. 쓰나미 이후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상당수의 이재민들이 학교 등에 마련된 임시 피난소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고통 받았던 사람들이 거기 있었다.
그곳에서 한 선교사를 만났다. 40대 초반의 여 선교사였다. 대학 실패 후 도피하다시피 일본에 왔다. 복음을 받아들였다. 새로운 삶이 시작됐다. 일본의 명문대도 졸업했다. 사회에 나가는 대신 하나님이 원하는 곳에 가기로 했다. 그 하늘 아버지 마음을 품고 센다이로 건너와 교회를 개척했다.
독신이었다. 외모는 곱상한, 착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왠지 서늘한 그늘도 보였다. 40대 초반의 독신 선교사로부터 어찌 한없이 구김살 없는 맑음만 기대할 수 있겠는가.
지진 이후 그녀는 각 지역의 피난소를 돌면서 밥을 지어 일본인들을 먹였다. 함께 지진 지대를 둘러보면서 일본인들이 그 선교사에게 보내는 존경의 눈빛을 볼 수 있었다. 지진 이후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그리운 사람들을 찾기 위해 미친 자들처럼 뛰어 다녔을 것이다. 그 사람들을 보면서 이 선교사 역시 사방을 헤매었을 터이다.
지진 이후 적지 않은 한인 선교사들이 잠시 일본을 떠났다. 그러나 남은 사람도 있었다. 떠난 이에게는 수만 가지 떠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남은 자에게도 같은 만큼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방사능 위험은 여전했지만 남은 사람들은 일본인들의 마음을 얻었다. 가장 위급할 때 함께 있어줬던 그 고마운 마음을 그들은 잊지 않고 있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떠난 선교사와 남은 선교사’는 엄연히 존재했다.
센다이 지진지대를 둘러 본 이후 도쿄로 돌아왔다. 도쿄에서 마침 인근의 목회자와 선교사들이 모인 조찬기도회에 참여했다. 모두 지진 피해자들과 일본 선교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했다. 일본 선교전략을 위한 토론의 시간도 가졌다. 참석자들은 평안한 모습의 소유자들이었다. 일본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었다. 기도회가 끝난 이후 식사를 했다. 안정되고 괜찮은 분위기 속에서 적절한 기도회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 조찬기도회에 참여하면서도, 많은 일본 선교사들과 만나면서도 나의 마음은 센다이의 지진 지대를 둘러보고 있을 그 여선교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현장을 뛰어다니며 일본인들을 품고 있는 그 모습이 그려졌다. 왠지 마음에 남았다.
한국에 돌아와서 몇 차례 통화하다 이후 연락이 끊겼다. 나는 나대로 처리해야 할 일상들이 많았다. 그러나 가끔 신문을 통해서 일본 소식, 특히 센다이 인근 지대의 소식을 접하게 되면 어김없이 그 선교사 생각이 났다. 솔직히 나에게 친절했던 도쿄의 어떤 일본 선교사님들보다도. 인간인 나의 마음이 그럴진대 하늘 아버지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종교부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