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하용조 목사 총괄 주치의 이철 연세대의료원장
입력 2011-08-31 09:41
고(故) 하용조 온누리교회 목사는 지난 7월 29일에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혈액투석 중인 그는 깨어 있었다. 하 목사가 내원하면 이철(62) 연세대 의료원장은 가서 안부를 물었다. 자는 모습만 보고 나올 때도 있었다. “목사님, 좀 어떠십니까?” “아이고, 바쁘실 텐데 어서 가서 일 보십시오.” 피차 마지막 대면인 것을 알았다면 한두 마디는 더 오갔을까. 하 목사는 사흘 뒤 쓰러졌다.
하 목사가 투석을 시작한 건 2006년 5월 3일이었다. 20년 이상 앓은 당뇨로 말기 신부전증이 겹쳤다. 피를 갈아 넣는 투석은 회당 4시간쯤 걸린다. 끝나면 두들겨 맞은 사람처럼 힘들어 보였다고 교회 관계자들은 전했다. 하 목사는 지난달 2일 뇌출혈로 숨질 때까지 매주 3차례 투석을 받았다.
“지금도 투석실에 가면 목사님이 와 계실 것 같다”며 이 원장은 허망한 듯 말했다. 온누리교회 장로이자 총괄 주치의였던 그는 각종 질병에 시달린 하 목사를 10년간 지척에서 돌봤다. 지난달 25일 서울 신촌동 의료원 집무실에서 만난, 경남 밀양 출신의 이 원장은 무뚝뚝하게 기억을 더듬었다.
의사 장로, 환자 목사
“특히 당뇨 관리가 절실했는데 신경을 너무 안 쓰셨어요. 그래서 ‘건강관리에 우선순위를 안 두면 투석을 하게 된다’며 투석 환자를 보여드렸어요. 그땐 조금 쇼크(충격)를 받으신 듯했어요. 2000년대 초, 안식년으로 미국에 계시면서 식단 조절과 운동에 굉장히 신경을 쓰셨어요. 귀국 후 검사했더니 지방간이나 간경화 등이 깨끗해졌어요. 그런데 당뇨는 계속 진행돼 2006년 결국 투석을 시작했어요.”
하 목사는 평생 병을 달고 살았다. 대학교 3학년 때 폐결핵으로 죽을 고비를 넘겼고, 25년간 당뇨에 시달렸다. C형 간염은 25년, B형 간염은 33년 앓았다. 1999년 12월엔 간암 진단을 받았다. 미국에서 수술했지만 1년 만에 재발했다.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온 건 두 번째 재발한 2001년 9월이었다.
“병원에선 각 과 명의들로 주치의 팀을 꾸렸어요. 의료원 기획조정실장이던 저는 당시 강진경 의료원장을 돕다가 2004년 강 원장이 돌아가시고 전체 주치의를 맡았어요.”
하 목사는 오랜 당뇨로 심장의 좌우 관상동맥이 손상돼 위축됐다. 의료진은 스텐트(혈관을 넓혀주는 관)를 왼쪽 동맥에 3개, 오른쪽 동맥에 2개 넣었다.
“보통 한 가지 병만 가지고도 절망하고 포기하는데 목사님은 결핵 당뇨 간암 등 온몸에 병을 가지고도 의연했어요. 병을 친구 삼으셨던 것 같아요. 강단에 올라가는 것조차 힘들어하면서 강단에 서면 어디서 그런 힘이 나는지 사자 같은 포효, 힘찬 목소리로 설교했어요. 그러고 내려오시면 완전히 탈진해서 걸음도 제대로 못하시고. 저는 주일마다 설교를 경청하면서도 의사로서 조마조마했어요.”
2002년 초여름, 하 목사는 아프가니스탄 방문을 강행했다. 중국 베이징과 파키스탄을 경유하는 일정이었다. 신장 기능이 안 좋다는 검진 결과 탓에 의료진은 만류했었다. 하 목사는 대신 베이징에서 피검사를 해 상태가 악화됐으면 귀국하기로 했다. 심장주치의이자 선교사였던 안신기 교수(지금 연세의료선교센터 소장), 가수 유승준 등이 동행했다. 하 목사는 정상 판정을 받고 아프간까지 갔다. 파키스탄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는 그해 3월 폭탄 테러로 51명이 사상한 기독교 교회를 들렀다.
“늘 ‘선교사의 빚이 있다’던 목사님은 당신이 먼저 가야 교인들이 아프간으로 간다면서 솔선수범했어요. 여러 질병으로 선교사의 꿈을 못 이루셨기 때문에 무리하면서도 틈이 나면 몸소 나가셨죠.”
중년의 눈물
이 원장은 85년 하 목사를 처음 봤다. 하 목사가 한남동 한국기독교선교원에서 젊은 부부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때였다. 동서 소개로 아내와 모임에 나간 이 원장은 온누리교회 창립 후 등록했다. “그 전에는 ‘선데이 크리스천’(일요일 예배만 참석하는 신자)도 못됐다”고 이 원장은 말했다. 그는 전공의 시절부터 근무지를 따라 교회를 옮겨 다녔었다. 하 목사를 대면한 건 새 신자 환영회에서였다.
“소탈하고 격의가 없었어요. 멀리서 설교만 들었지 일대일로 만난 적이 없었는데 목사님은 10년 이상 알고 지낸 사람처럼 대해줬어요. 교회 분위기도 다른 데랑 너무 달랐어요. 예배 후엔 서로 손잡고 기도하는데 조금 당황스럽기도 했어요. 예배 때 눈물을 많이 흘렸죠. 한국 중년 남성이 그러는 일은 거의 없잖아요. 저는 감정이 드라이(건조)한데 그런 일을 겪으면서 성경도 깊이 보게 됐어요.”
2001년 이후 이 원장은 주치의여서 하 목사를 자주 만났다. 하 목사는 “내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자문을 구하면 전문가들은 항상 어렵다며 문제점만 말해서 실망이 참 크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저 들으라고 하신 말씀 같아요. 목사님이 포항선린병원을 돕자고 했을 때 부정적 의견을 밝혔거든요. 병원은 의료 인력이 가장 중요한데 지방에선 구하기 어려워요. 그런데 서울서 교수하던 분이 사직하고 내려갔어요. 생각도 못 한 일이 일어나는 걸 보면서 목사님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겼죠.”
이 원장이 2007년 쓴 ‘세브란스 드림스토리’는 하 목사 권유로 출간됐다. 세브란스병원의 역사와 뒷이야기를 정리한 책이다. 드림스토리(꿈 이야기)는 꿈의 가치를 강조하던 하 목사가 정한 제목이다.
의학의 한계
하 목사는 죽기 직전까지 강단에 섰다. 지난 7월 31일 설교할 때도 죽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날 딸과 새벽까지 대화하다 잠든 하 목사는 1일 오전 1시30분쯤 침대에서 신음하며 발견됐다. 대량 뇌출혈이었다. 2차례 수술했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사망 선고는 다음날 오전 8시40분 내려졌다.
“이미 의학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어요. 금년 초부터 뇌출혈과 심장마비의 위험성을 말씀드렸죠. 당뇨 때문에 온몸의 혈관이 손상된 상태였어요. 뇌출혈이 갑자기 나타날 수 있고 스텐트를 넣은 관상동맥도 다시 막힐 수 있었어요. 이제 다 내려놓고 건강관리만 해달라고 했는데 당신은 ‘강단에서 생을 마치겠다’며 건강을 돌보지 않았어요. 주일 설교 후 돌아가신 걸 보면 순교하신 셈이에요.”
하 목사가 병원에 실려 왔을 때부터 사망 선고가 내려지고 장례를 치를 때까지 이 원장은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그 사이 지난 10년간 넘긴 위급 상황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고 이 원장은 말했다.
“허무하고 허탈했어요. 예견한 일이지만 막상 현실로 나타났을 땐 믿기지 않았어요. 당신은 절대 고통을 표현한 적이 없으셨어요. 힘들었을 텐데 더 따뜻하게 위로해야 하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고비
이 원장은 고교 시절 이과였는데 수학은 잘 못해서 의사가 됐다고 한다. 소아과 전문의로 미숙아와 신생아를 담당했다. 국내에서 인큐베이터 치료를 활용한 1세대다. 전공의와 군의관 시절부터 의료분쟁을 연례행사처럼 겪었다.
“그때마다 의사를 못할 것 같았어요. 87년엔 임상의사가 아닌 약리학 교수로 진로를 바꿀까도 고민했죠. 하나님은 감당할 시험만 주신다는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0장 13절을 붙들고 이겨냈어요. 의사 생활을 오래 할수록 생명과 진료에 대한 두려움은 커집니다.”
이 원장이 추천하는 건강관리법은 상식 수준이었다. 소식, 음식 고루 먹기, 싱겁게 먹기, 주기적으로 운동하기, 좋은 자세 유지하기, 금연 등. 누구나 알지만 좀처럼 실천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이런 게 몸에 배면 건강이 저절로 유지돼요. 과식, 술 담배, 맵고 짠 음식. 거기서 줄줄이 병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과식하고 운동하는데 뭐 하러 그래요. 좋은 식습관이 최고예요.”
아프간의 장미
이 원장 인터뷰 전 안신기 의료선교센터 소장을 같은 건물 그의 사무실에서 잠시 만났다. 그는 2002년 하 목사와 아프간을 다녀왔다. 당시 베이징에서 하 목사의 피검사를 한 사람이 안 소장이다.
“아프간 숙소에서 어느 날 아침 목사님이 마당에 나가서 장미를 따 오셨어요. 섞어찌개인가 김치찌개를 끓였는데 꽃잎을 그 옆에 놓으시는 거예요. 함께 식사하는 사람들이 행복해했죠. 크게만 보이던 분이 그렇게 옆에선 참 친구 같았어요. 공항에선 아무 데서나 픽픽 쓰러지시고 음식도 흘리고.”
하 목사는 병상에서 평신도인 안 소장의 손을 잡고 종종 말했다고 한다. “기도 좀 해 줘.”
글 강창욱 기자·사진 이병주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