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노경남 (5) 교육이 복음 전파의 최선임을 깨달아
입력 2011-08-22 18:00
1991년 3월 결혼 후 우리 부부는 부천 심곡제일교회에 정착했다. 나는 유치부장을 맡았으며,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만 되면 전도팀을 이끌고 부천역으로 향했다.
나는 교회에서 새벽예배를 드리고 전도현장, 수학학원, 과외 가정집을 순서대로 오가며 바쁜 하루를 보냈다. 서울 목동 학원가에서 수학 강사로, 개인과외교사를 하면서 꽤 많은 돈을 벌었다. 가장 큰 성과는 돈보다 교육이 복음전파에 가장 좋은 접촉점 역할을 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건 부모와의 전화통화 때 여실히 드러났다.
“○○네 집이죠? 교회 유치부장 노경남입니다.” “아, 우리 아이 지금 학원 갔는데요.” “그럼 ○○가 이번 주 교회에 꼭 올 수 있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 주 교회에서 달란트 잔치를….” “저기, 바쁜데 다음에 전화주세요.”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지만 학원 수학교사 입장에서 전화를 하면 부모들의 반응은 180도 달라졌다. “학원 수학교사 노경남입니다.” “아, 선생님 안녕하셨어요?” “식사 중인데 전화를 드렸군요. 죄송합니다. 다음에 전화 드릴게요.” “아이고, 아닙니다. 식사는 나중에 해도 괜찮습니다. 요즘 우리 ○○가 수업을 잘 받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느 부분을 보강하는 게 좋을까요. 아니, 그러지 말고 제가 지금 선생님께 찾아갈게요.” “지금은 시간이 안 되고 주일예배 후에나 가능한데요.” “그럼 제가 내일 교회로 가겠습니다.”
그때는 정말 바쁜 일과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커 새벽부터 밤까지 교회 일이라면 우선적으로 달려 나갔던 것 같다. ‘몸이 으스러질지라도 하나님의 일에는 무조건 최고의 것으로 최선을 다 한다’는 게 내 신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늘 나에게 감사하고 행복한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92년 1월이었다. 임신을 하고 산부인과를 찾았는데 의사선생님이 자궁근종으로 태아가 자랄 환경이 되지 않는다는 절망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산모가 위험하면 최악의 경우 태아를 유산시켜야 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선생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런 경우는 장애아가 태어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가슴이 철썩 내려앉았다. 우리 부부는 주님께 매달리기로 했다. “여보, 생사화복이 하나님께 있잖아요. 이제 우리 의사선생님께 의존하기보다 하나님께 매달리기로 해요.” 남편은 나와 함께 새벽마다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다.
몇 개월 후 의사선생님이 빙그레 웃으면서 나를 맞이했다. “이제는 됐습니다. 아기집은 있지만 아기가 성장하지 않아 걱정했는데 마음 놓으셔도 되겠습니다.” “오, 할렐루야!”
이렇게 간절한 기도가 있었으니 우리는 분명 모세처럼 준수한 아이가 태어날 것이라고 잔뜩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출산 이후 또다시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출산 후 두 달이 지났을 때의 일이다.
“언니, 아무래도 아기가 이상해요. 고개를 양쪽으로 돌리지 못하는 것 같아요.” “뭐? 아니, 정말 그러네. 여보, 빨리 이리 와서 성환이 좀 보세요.”
종합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니 정말 아기가 고개를 돌리지 못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거룩한 ‘성’에 빛날 ‘환’자를 써서 거룩하고 빛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바랐던 아들이지만 그런 상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절망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차라리 내 신체 중 한 부분을 떼 내서라도 고치고 싶었다. 눈물이 나지만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성환이를 다른 가정에 주시지 않고 저희 가정에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