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 ‘바다’ 주연 고수희 “멜로영화 주인공이라는 말에 속아 출연 약속했죠”
입력 2011-08-19 22:58
박찬욱 감독의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에서 바람난 남편과 정부(情婦)를 살해한 뒤 그들의 인육을 씹어 먹다 붙잡혀 온 교도소의 마녀, 봉준호 감독의 ‘괴물’(2006)에서 병원에 감금돼 있던 강두(송강호)가 탈출할 때 인질로 삼았던 간호사, 최근 740만 관객을 돌파한 ‘써니’에서 실적이 만년 꼴찌인 보험설계사로 나오는 왕년의 칠공주 멤버 장미.
누군가 떠오르는 인물이 있을 것이다. 170㎝를 약간 넘는 키에, 몸무게 90㎏에 육박하는 육중한 체격의 개성파 배우. ‘미친 존재감’ ‘명품 조연’ 등의 찬사를 받으며 연기파 배우 자리를 굳혀가고 있는 고수희(35)다.
조연 연기를 주로 해 온 그가 드디어 스크린에서 첫 주연을 맡았다. 다음 달 1일 개봉하는 독립영화 ‘바다’(감독 윤태식)에서다. 이 영화에서 그는 호스티스 진이(김진이), 그림을 그리는 눈먼 소년 태성(전지환)과 함께 얼떨결에 바다로 향하는 헤비급 복서 수희로 등장해 다시 한번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지난 16일 서울 행당동 CGV왕십리에서 만난 고수희는 첫 주연을 맡게 된 걸 축하한다고 덕담을 건네자 “어머, 저 이번이 첫 주연 아니에요. ‘써니’에서도 제가 주연이잖아요. 저는 제가 늘 주연이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찍어요. ‘바다’가 첫 주연이라고 하시니 이상하네요”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그래도 영화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주연으로서는 처음이니 부담을 느끼지 않았느냐고 묻자 “느낌은 다른 게 없었다. 그런 부담 안 가지려고 평소와 똑같이 작업했다”고 말했다.
‘바다’에서 그는 체육관 코치를 짝사랑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해 절망하는 헤비급 복서 수희로 열연한다. 멜로 연기를 해보고 싶다는 소원을 푼 셈이다. 그런데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기회 있으면 멜로 연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었죠. 그럴 때마다 ‘네가 제작비를 대면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런데 윤태식 감독이 멜로 영화인데 저를 주인공으로 쓰고 싶다는 거예요. 드디어 기회가 온 거죠. 대본을 보지도 않고 출연하겠다고 약속했어요. 나중에 대본을 보니까 이게 멜로인 듯 하면서도 아니더라고요. 감독에게 속은 거죠(웃음).”
그의 ‘명품 연기’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그는 내면을 끄집어내려고 노력하는 게 비결이라면 비결이라고 소개했다.
“저는 내 안에 가지고 있는 어떤 것들을 꺼내 놓으려고 하는 편이에요. 없는 걸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 그러면서도 내가 미처 느끼지 못한 것을 끄집어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2000)를 꼽았다. 그는 영화로는 첫 출연작인 이 영화에서 배두나의 친구인 뚱뚱한 문구점 주인으로 나왔다.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지만 첫 작품이라 더 애정이 가는 것 같아요. 저에겐 새로운 도전이었거든요.”
고수희는 1999년 연극 ‘청춘예찬’(연출 박근형)으로 연기에 데뷔했다. 간질을 앓는 다방 여종업으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그는 봉준호 감독에게 발탁돼 ‘플란다스의 개’에 출연했고 이후 영화, 연극, 드라마(SBS ‘자명고’)를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2007년엔 연극 ‘경숙이, 경숙아버지’에서 경숙 엄마 역으로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았고, 2009년에는 한·일 합작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으로 요미우리 연극상 여자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고수희는 “저는 감독 운도 정말 좋고, 상대 배우 운도 굉장히 좋은 것 같다”며 “특별히 욕심내는 배역은 없다. 어떤 역이든 맡기면 잘 소화하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라동철 선임기자 rdch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