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장면 속에 똬리 튼 ‘욕망’… 홍상수 감독의 ‘북촌방향’

입력 2011-08-19 17:25


지난 17일부터 서울 CGV압구정에서 열리고 있는 제5회 시네마디지털서울 영화제(CINDI 2011)의 개막작으로 상영된 ‘북촌방향’은 한국의 대표적 작가주의 감독인 홍상수(51)의 색깔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작품이다. 홍 감독의 열두 번째 영화이자 두 번째 흑백영화로 그가 구축해 온 독특한 영화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영화의 배경은 서울 종로구 계동 일대 북촌이다. 영화감독 출신의 지방대 교수인 성준(유준상)이 북촌에 사는 선배 영호(김상중)을 만나러 올라와 며칠간을 지내며 벌어지는 기묘한 일들을 담았다. 성준은 북촌 거리를 배회하기도 하고, 그러다 밤이 되면 영호, 영호의 후배인 여교수 보람(송선미), 성준의 첫 작품에 출연했던 전직 배우 중원(김의성)과 어울려 술집 등에서 술잔을 기울인다. 나누는 얘기는 여느 술자리에서나 들을 수 있는 말들이거나 ‘개똥철학’ 수준의 생각들이다. 이들 속에 성준의 옛 애인 경진(김보경)과 그녀를 빼닮은 술집 여주인 예전(김보경)이 끼어든다.

특별한 사건이나 소재도 눈에 띄지 않는다. 비슷한 장면, 같은 인물, 비슷한 대사들이 반복적으로 펼쳐지고 이야기는 밋밋하게 흘러간다. 그런데도 영화는 웃음과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비슷한 장면과 상황의 반복을 통해 내면 깊숙이 잠재돼 있는 인간의 속물스러운 욕망을 끌어내온 감독의 주특기가 다시 빛을 발한다.

홍 감독의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에서 주인공 효섭을 맡았던 김의성이 15년 만에 다시 홍 감독과 호흡을 맞췄다. 홍 감독 작품에 자주 출연해 온 고현정과 전방위 예술가 백현진도 단역으로 얼굴을 내민다.

헌법재판소 앞 사거리, 정독도서관 입구와 주변 언덕길 등 북촌을 자주 찾는 이들에게는 낯익은 장소들이 배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눈 내리는 북촌의 실제 새벽 풍경을 볼 수 있는 것도 즐거움이다.

지난해 겨울 크리스마스를 전후해 보름여 동안 촬영했는데 배우 개런티까지 포함해 제작비가 1억원이 채 들지 않았다고 한다. 러닝타임 79분으로 19세 이상 관람가. 지난 5월 제64회 칸국제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공식 초청돼 상영됐고, 국내에서는 다음 달 8일 개봉될 예정이다.

CINDI 영화제의 정성일 프로그램 디렉터는 “‘북촌방향’은 어느 겨울의 마술에 모든 것을 의지한 대담하고도 생명의 기쁨에 찬 시적인 기록이다. CINDI 영화제의 정신과 나아가야 할 방향, 영화제의 영혼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이다”고 개막작 선정 이유를 밝힌 바 있다.

라동철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