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라의 수다] 어쩔수 없는 현실?
입력 2011-08-18 18:20
바즈 루어만 감독의 영화 ‘오스트레일리아’가 3년 전쯤 한국에서 상영됐다. 세상을 변화시키려 노력하는 이상주의적 여성으로 나오는 니콜 키드먼의 대사가 지금도 뇌리에 또렷하게 남아 있다. “현 상태가 그렇다고 해서 계속 그래야 할 이유는 없다.”
이 말은 내가 한국의 사회문제를 토론할 때 가장 자주 사용하는 영화 속 대사다. 불만이 있으면서도 현 상태를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의 체념적 태도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토론주제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다. 직장문화, 성차별, 학교제도, 인종차별, 동물학대 등 한국사회의 부정적인 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항상 “그래, 문제가 많아. 하지만 현실이 그런 걸 어쩌겠어?”라는 말을 듣게 된다. 내가 ‘오스트레일리아’의 영화 속 대사를 사용하는 시점이다. “현실이 그렇다고 계속 그래야 하는 거야?” 그러면 상대방은 황당한 표정을 짓곤 한다.
언젠가 문학행사에서 한국의 사회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더니 대기업 직원이라는 사람이 “우리도 그렇게 살기 싫다고요!”라며 흥분해서 외쳤다. 그럼 한국인은 왜 그렇게 사는 걸까? 많은 문제가 사회구조의 문제로 고착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작은 실천으로도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어머니 중에는 정규수업 후에 아이를 학원에 보내기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아이 친구들이 모두 학원에 다니기 때문에, 놀이터에 가도 같이 놀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자녀에게 그런 스파르타식 교육을 강요하고 싶지 않다면 인터넷에 안티 학원 카페를 만들어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의 자녀들끼리 학원 아닌 곳에 모여 놀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직장상사가 괴롭힐 때에도 뒤에서 험담만 하거나 직원끼리 편을 나누어 서로를 갉아먹을 일이 아니라 서로 힘을 합쳐 폭군 상사를 저지할 수 있다.
성차별도 마찬가지다. 사회적으로 기반을 잡은 여성들이 갓 입사한 여직원들을 의식적으로 후원한다면 남녀평등을 이루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보이는 모습은 오히려 반대다. 여자 상사들 또한 남자 직원을 선호하고 성차별을 자행한다.
진심으로 삶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극적인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 내가 아는 한국청년 하나는 광고회사에 다녔는데 자신의 이상과 맞지 않는 고달픈 직장생활을 때려치우고 요리를 배워 레스토랑을 차렸다.
한국은 OECD 국가 중 국민의 행복지수가 가장 낮은 국가에 속한다. 어린이 및 청소년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몇 년째 꼴찌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단기간에 세계가 놀랄 만한 경제성장을 이뤘다. 그래서 한국을 모델로 삼는 나라도 많다. 특히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에 한국의 경제성장 모델이 수출된다는 기사를 읽을 때면 꼭 카메룬이 떠오른다.
개발도상국인 카메룬의 거리에서는 사람들이 춤을 춘다. 그런데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룬 한국의 지하철에서는 진이 다 빠진 피로한 얼굴의 직장인들이 잠을 잔다. 경제성장의 대가가 이렇게나 큰 것일까?
베라 호흘라이터(tbs eFM 뉴스캐스터)·번역 김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