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보타이시 무덤… 아픔이 들리나요?
입력 2011-08-18 19:43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이재갑 근·현대사 20년의 기록
붉고 검은 돌이 있었다.
사람 키의 두 배쯤 되는 풀이 을씨년스럽게 그 돌 주위에 피어올랐다. 사람의 묘비라기엔 조그만 돌은 일본인이 고양이나 개의 묘를 만들 때 쓰는 돌과 비슷한 ‘보타이시’(폐광석)다. 후쿠오카현 지쿠호(筑豊) 지역 다다구마 탄광 인근의 무연(無緣) 묘지. 그 묘지에 쓰인 돌이 보타이시다. 이 보잘 것 없는 돌 밑에 강제징용된 조선인이 잠들어 있다.
“우리의 고향은 경상북도인데 나는야, 어째서 숯 파러 왔느냐. 일본 땅 좋다고 누가 말했느냐. 일본 땅 와 보니 배고파 못 살겠네. 숯을 팔 때는 배고파 죽겠는데 그 말만 하면은 몽두리 맞았네. 배가 고파요! 어머니 보고 싶소! 고향에 가고 싶소! 눈물을 흘리면서 편지를 썼네. 어머니 장에서 쌀가루 부쳐 왔네. 쌀가루 받아들고 눈물만 흘렸네. 보따리 풀어서 쌀가루 집어먹고 눈물을 흘리면서 어머니 불러 봤네. 어머니 소리도 크게 못 부르고 감독 놈 겁이 나서 가만히 불러 봤네.”
강제징용된 조선인 2세 배래선 선생이 묘에 막걸리를 뿌리며 ‘신세타령가’를 불렀다. 이름 없는 한 조선인이 불러 구전된 노래였다. 당시 조선인은 광산에서 사고로 목숨을 잃어도 장례식을 치를 수 없었다. 밤늦은 시간 동료들이 유골을 수습해 폐광석으로 묘지를 표시했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폐광석 위에 울려 퍼진 ‘신세타령가’는 실처럼 가느다랗게 무덤을 위로했다.
2008년 1월 배 선생과 조선인 묘지를 동행한 사람은 이재갑(46) 사진작가였다. 이 작가는 2007년부터 최근까지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조선인 강제징용의 역사 현장을 카메라에 담았다.
미군과 한인 여성 사이에 태어난 혼혈인을 시작으로 한국전쟁 직후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된 경산 코발트 광산 사건, 조선인 강제징용까지 이 작가의 다큐멘터리 사진 작업은 20년째 한국 근대사의 궤적을 밟고 있다. 16일 서울 여의도 본사 사옥에서 그를 만났다.
-20년째 한국 근현대사에 집중한 작업을 보면 작가로서의 고집이 보인다.
“전혀. 난 유화적인 사람이다. 고집이라기보다 신념이겠지. 내가 잘 하는 일을 계속하는 것, 그게 상식 아닐까? 한 방송국에서 날 찍어 ‘아웃사이더의 삶’이란 프로그램을 내보냈다. 내가 PD에게 따져 물었다. 나는 늘 중심에 있는데, 왜 아웃사이더냐고. 그 PD가 이렇게 답하더라. ‘당신 말대로 돈이 되든 안 되든, 명예를 주든 안 주든 원하는 일을 꾸준히 하는 게 당연한 거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다 그렇게 돌아가지는 않는다. 방송 제목을 <지극히 정상정인 삶>이라고 붙이면 누가 보겠냐?’ 그 PD 말이 정답이지 싶더라. ‘나는 대한민국 상위 1%’라고 종종 말한다. 왜냐.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니까.”
-신념이 밥벌이로서의 충분한 대가를 주는가?
“내 월급이 한때 40만원이었다. 하하. 농담 섞인 말인데, 돈 없이 작업 하니까 은행 다니는 친구가 신용카드를 만들어 주더라. 그때 현금 서비스로 매달 40만원 받았다. 20만원은 필름 사고, 나머지 돈으로 활동했다. 아르바이트 하면서 그 돈 갚고 다음 달 또 (현금) 서비스 받고. 꿈이 냉장고에 필름 잔뜩 사서 쌓아놓고 사는 거였다. (카메라) 장비 사서 화장실에서도 끌어안고 혼자서 막 웃고 그랬다. 지금도 대학 두 곳에 출강 하는데 아직 집에 생활비를 주진 못한다.”
-그 신념이란 게 구체적으로 뭔가.
“길거리 역사가 아니라 길 위에 난 역사를 사진에 옮기는 것. 혼혈인이나 조선인 문제는 주제를 넘어 내 삶의 중요한 축이다. 개인의 역사,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고. 강자가 만드는 것도 있지만 힘없는 사람이 만드는 것, 가지지 못한 자가 만드는 것도 역사다.”
-당신 작업의 근간을 역사의식이라고 보면 되나.
“대단한 역사의식 보다는… 사람이 내 작업의 근간이다. 혼혈인도, 조선인도 역사의 한 축이지만 내게는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이기도 하다. 다만 그 명칭이 조선인이고 혼혈인인 거지. 그걸 빼면 다 사람이잖나. 나는 스스로 예술가라 생각하지 않는다. 기인(奇人)도 아니고. 그냥 현장에 있는 사람, 작업하는 사람일 뿐이다.”
-상업용 사진 찍을 생각은 안 해봤나?
“한때 했다. 계기가 뭐냐면, 아… 눈물나려고 하네. 아내가 밤 11시에 과외수업 하러 나가고 나는 집에서 애를 돌봤는데, 애가 밤에 계속 우는 거다. 배가 고파 우는가 싶어서 분유통을 열었는데 통이 텅 비어 있었다. 그때 아기 안고 막 울었다. 아기도 울고. 그때부터 좀 전투적으로 변했다. 요즘은 내가 쓴 책 달라고 하면 사서 보라고 말한다. 내 땀이 담긴 거니까. 예전 같았으면 그렇게 말 못 했을 거다.
누가 그러더라. 형님도 돈 되는 사진, 거실에 걸 수 있는 편안한 풍경 사진을 찍으라고. 한(恨), 이런 소재 말고. 그 말 듣고 풍경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최종 실렉트(선택) 할 때 결국 내가 고른 것은 아픔이 담긴 사진이었다. 내 스스로 (풍경 사진을) 선택하지 못하는 거다.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은 사진이 어떻게 남을 감동시키나.”
-사람이 희망이라고 보는, 휴머니스트인가?
“동물은 배가 부르면 자기보다 약한 걸 안 잡아먹는다. 사람은 배가 불러도 늘 뭔가 저장을 하지. 그게 인간의 속성이고 그래서 때론 잔인한 거고. 하지만 그런 인간을 이해하고 회복시키는 것도 인간이다. 내가 하는 사진 작업도 결국 사람을 위한, 자기 성찰의 일종이다. 조금 다른 얘긴데, 사진이 한때는 문학과 놀았고, 미술과도 놀았다. 나는 사진이 정말 제대로 가려면 인문학과 놀아야 한다고 본다. 사람을 탐구하는 것.”
-작가들은 위험한 전쟁터에서 우는 아이를 찍어 그것으로도 명예와 돈을 얻는다. 휴머니즘도 때론 이용 대상이 된다. 당신은 어떤가?
“나에게도 물론 그런 면이 있다. 하지만 창작자로서의 신념과 기준은 명확히 있다. 혼혈인 형님들과는 지금껏 20년 동안 모임도 갖고 만나고 있다. 이제껏 형님들과 한 약속 두개를 지켰다. 하나는 책을 만드는 것,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변하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는 거다. 내가 형님들을 단지 사진 대상으로서만 찍었으면 지금껏 올 수가 없다. 그 형님이 원하지 않는 것, 예를 들면 신문에 내는 걸 싫어하면 완성도가 있더라도 그 사진은 빼고 (신문에) 실었다. 혼혈인 작업은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그 작업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할 거다. 강제징용 문제도 그렇고.”
-사진이 역사를 기록한다고 믿는가?
“기록보다 기억을 위한 거라고 본다. 사람과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사진.”
-피사체에 감정을 갖는 것, 사랑과 애정을 담는 게 객관적인 사진 작업을 방해하지 않나?
“혼혈인이든 조선인이든 단 한번도 불쌍하다고 생각해 본적 없다. 절대 없다. 불쌍한 사람은 기생하는 사람, 이러쿵저러쿵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다. 그분들은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더 부자고 더 강하다. 그런 게 없으면 자기를 지키지 못할 정도로 힘드니까.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도 일본인으로 귀화하지 않은 조선인이 더 많았다. 슬프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림자처럼 (사진에) 들어가는 것이다. 내 사진에 보면 가끔 내가 나온다. 그림자로. 잔영처럼 거기 들어가는 게 고통을 느끼는 작은 일이다.”
-의미 있는 사진은 어떻게 나오나?
“의미 있는 사진을 찍으려면 이 사람이, 벽이, 땅이 하는 말, 넋두리를 들어야 한다. 가만히 응시하면 그 공간이 말하는 아픔이 들린다. 서대문 형무소에 가서 적색 벽돌을 10분만 가만히 보고 있어 봐라. 느낌이 다를 것이다. 벽돌 한 개, 한 개를 누가 쌓았겠느냐, 조선인이다. 일본 땅을 거미줄처럼 연결하고 있는 철도길 침목(枕木) 하나하나에 조선인의 피땀이 스며들어 있다.”
-타인의 아픔에 예민한 편이겠다.
“사람들이 하는 말의 속뜻을 잘 알아듣는 편이다. 암으로 돌아가신 혼혈인 형님이 한 분 계시는데 그분이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빌린 박씨다.’ 아버지가 미군이어서 빌린 박씨라는 얘기다. 웃으면서 말했지만 형님 표정을 보면서 (아픔이) 얼마나 가슴에 저미고 저며서 저런 말씀을 할까, 생각했었다. 팔을 탁, 때려서 느껴지는 아픔이 아니라 날카로운 손톱으로 살을 끝까지 꾹 눌렀다 떼는 그런 아픔이다, 그분들의 상처는.”
-이토록 오래 근현대사 작업에 천착한 작가는 거의 없다. 자부심을 느끼나.
“누군가 내게 이 분야의 1등이라 말하기도 한다. 난 단지 돌아보니 내 뒤에 아무도 없었을 뿐이다. 남 위에 있는 거 잘 못한다. 사람들이 같이 잘 사는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나? 자존심을 세우는 게 아니라 다들 서로 자존감을 높이는 거다.”
-당신이 집중한 소재는 대부분 근현대사다. 결국 분단과 이념 문제가 빠질 수 없다.
“지금이야 조선인 강제징용이라 말하면 다들 한번에 이해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조선인’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한쪽으로 편향된 사람으로 오해받은 적도 있다. 오키나와에 가면 강제징용된 조선인 무덤이 있다. 거기엔 두 가지 묘비가 있다. 한국과 북한 국적으로 나뉘는 거다. 전쟁이 날 때는 그냥 조선에서 끌려간 사람들인데 해방되고는 그분들의 고향이 어디냐에 따라 갈라졌다. 그걸 보면서 저 사람들은 모르고 왔을 텐데 죽어서 나뉘는구나, 그런 서글픔을 느꼈다.”
-어떤 사진가로 남고 싶나?
“글쎄, 그냥… 한 사람으로.”
이 작가는 이달 조선인 강제징용 역사를 담은 ‘한국사 100년의 기억을 찾아 일본을 걷다’를 발간했다. 사진전 ‘상처 위로 난 풀꽃’은 대구 남성로 태갤러리에서 26일까지 전시된다. 그의 꿈은 사람을 찍는, 사람을 기억하게 하는, 또 하나의 사람이었다.
사진 제공=이재갑, 글=박유리 기자 nopim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