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노경남 (3) 신학교 입학 반대에 가출, 친척집 전전

입력 2011-08-18 18:04


아버지의 불호령에도 신학교에 가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평소 화 한 번 안 내시던 아버지의 성난 모습에 놀라 정신을 잃고 쓰러지기까지 했다. 할아버지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 세상에서 네가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고, 하나님이 없다면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겠구나”고 하셨다.

교회가 없던 우리 마을에 1990년경 동산교회가 세워졌다. 씨족 마을에 교회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온 마을 주민들이 똘똘 뭉쳤다. “우리 마을에는 절대 교회를 세울 수 없으니 당장 나가시오!” 동네 사람들은 교회에서 나눠 준 쟁반을 모두 걷어 교회 마당에 갖다 놓을 정도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할아버지는 “예수에 미쳐 있는 우리 손녀도 어디선가 이런 구박을 받고 있을 것”이라며 3일간 교회 부흥회에 참석해 목사님을 위로해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교회 개척 후 어려울 때마다 큰 힘이 되셨다. 할아버지는 예수님을 믿고 술과 담배도 끊으시고 7년간 신앙생활을 하시다 98년 90세의 연세로 하늘나라로 가셨다.

나의 20대는 교회 장의자에서 기도하며 자는 날이 더 많을 만큼 전도와 기도에 전념했다. 그때 하나님은 내 삶의 전부였고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었다.

86년 나는 집을 나와 고모댁과 삼촌 집을 전전했다. 나중엔 친구 집에 들어가 87년 주경야독하며 자립하게 됐다. 고등학교 때 경시대회에 나갈 정도로 수학을 잘했기 때문에 밥벌이 수단이 됐다. 낮에는 학원 수학 강사로 일했고, 밤에는 부천에 위치한 한남신학교에서 공부했다. 신학교 공부가 끝나면 교회에 가서 청년들과 함께 새벽까지 기도하고 토요일과 주일이면 북을 치며 온 동네 어린이들을 전도했다.

신학교 1학년이던 87년 12월 어느 날이었다. 아버지께서 상경하셨다. “여기 있다.” 신문지에 쌓인 묵직한 물건을 내려놓았다. 등록금이었다. 그렇게 반대하시던 아버지셨지만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었다. 그게 자식을 향한 부모 마음임을 알 수 있었다.

전철과 버스에서 전도를 했다. 남는 시간에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어느 날 부천역에 있는 로얄백화점 앞에서 전도를 하는데 술 취한 아저씨가 욕설을 퍼부었다. “너 예수 봤어? 너도 못 본 예수를 믿으라고 하냐 말이지. 이 XX년아. 앞으론 이런 짓 하지 말라고!”

어떻게 해야 할지 안절부절 못했다. 예수 믿으라고 외칠 때는 들은 척도 않던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너무 당황스러웠다. ‘성령님, 함께해주세요. 지혜를 주세요.’ 간절히 기도한 후 담대하게 외쳤다.

“아저씨, 그렇게 말씀은 하시지만 떨리시죠? 솔직히 하나님이 아저씨 사랑하는 걸 아시기에 두려우실 겁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따지고 방해하는 이런 분까지도 사랑하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말한 뒤 집에 돌아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너도 못 본 예수를 믿으라고 하냐”는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어느 날 밤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셨다. 주님은 나를 넓고 넓은 바다로 데리고 가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때부터 천국의 아버지 집으로 인도해야 할 잃어버린 영혼을 찾는 데 더욱 힘썼다. 그때 전도했던 수많은 사람 중에 훗날 남편이 될 사람이 있었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