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칸 고택 원형 그대로 그곳에서 길손은 쉰다… 슬로시티 지정된 ‘청송 덕천마을’
입력 2011-08-17 17:52
고래등 같은 99칸 고택이 원형 그대로 보존된 마을. 시내에는 다슬기가 지천이고 텃밭에서는 옥수수가 익어가는 마을. 외씨버선처럼 선이 유려한 고샅길을 사이에 두고 정다운 이웃사촌들이 모여 사는 마을. 빛바랜 사진첩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어릴 적 고향의 추억이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그 마을은 우리나라에서 10번째 슬로시티로 지정된 경북 청송 파천면의 덕천마을이다.
심심산골인 덕천마을은 전형적인 산촌이다. 마을 앞을 남북으로 흐르는 신흥천의 서쪽 산자락에 옹기종기 처마를 맞댄 마을은 청송 심씨 집성촌. 조선 영조 때 만석지기의 부를 누린 심처대(沈處大)의 7대손인 송소(松韶) 심호택(沈琥澤)이 인근의 지경리 호박골에서 조상들이 살았던 덕천리로 옮겨오면서 마을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청송 심씨는 조선 오백년 동안 세종대왕 왕비인 소헌왕후를 비롯해 왕비 4명, 부마 4명, 정승 13명을 탄생시킨 명문대가.
아름드리 왕버드나무 세 그루가 마을 입구를 지키는 덕천마을에서 가장 큰 한옥은 마을 중앙에 위치한 송소고택. 홍살문이 있는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정면 5칸·측면 2칸의 사랑채를 비롯해 안채, 별당채 등 7동의 건물이 ㅁ자형으로 펼쳐진다. 송소고택은 강원도 강릉 선교장과 함께 몇 안 되는 99칸 전통한옥으로 올해 숙박체험 부문에서 ‘한국관광의 별’을 수상했다.
여느 한옥과 달리 송소고택에 들어서면 먼저 ㄱ자형의 헛담을 만나게 된다. 헛담은 대문이나 사랑채에서 아녀자들의 공간인 안채를 보지 못하도록 설치한 담장으로 내외담이라고도 한다. 못을 쓰지 않고 만든 사랑채의 우물마루와 1㎜의 오차도 허용 않는 안채의 빗살무늬 교창은 부를 상징하고, 솟을대문을 여닫을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나도록 한 것은 찾아오는 손님이 많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서다.
송소고택에서 가장 특징적인 구조물은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담장에 뚫린 주먹 크기의 구멍. 사랑채에서 보면 6개지만 안채에서 보면 3개인 이 구멍은 안채에서 사랑채 손님이 몇 명이나 왔는지 알기 위해 엿보는 용도로 쓰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안채 구멍 한 개에 사랑채 구멍 두 개가 45도 각도로 연결돼 안채에서는 사랑채가 보이지만 사랑채에서는 안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 남녀가 눈을 맞출 수 없는 조선시대 양반가들의 엄격함이 탄생시킨 비밀의 구멍인 셈이다.
80여 가구 180여명이 살고 있는 덕천마을에는 송소고택을 비롯해 모두 5채의 고택이 보존돼 있다. 송소고택의 별당채와 쪽문으로 연결된 송정고택은 심호택의 둘째아들 송정 심상광이 지은 집으로 넓은 마당이 인상적이다, 송소고택과 함께 고택체험이 가능한 송정고택에서는 천연염색 등 다양한 체험도 가능하다.
담장을 사이에 두고 송소고택과 이웃한 찰방공종택은 1933년 지어진 건물로 마당이 넓은 한옥. 사랑채 옆에는 군불을 지필 때 쓸 장작이 쌓여 있고, 마당에는 붉은 꽃을 활짝 피운 다알리아 꽃밭이 눈길을 끈다. 이밖에 덕천마을에는 심호택이 1917년 동생이 분가할 때 지어준 창실고택 등이 있다.
접시꽃 나리꽃 호박꽃 봉선화 등 형형색색의 꽃이 만발한 한여름의 덕천마을은 산책하듯 한바퀴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텃밭으로 쓰는 빈 집터에는 옥수수, 참깨, 고추가 익어가고 발돋움을 하면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담장은 호박꽃으로 뒤덮여 있다. 울 밑에 선 봉선화는 손톱에 꽃물 들일 날을 기다리다 지쳐 빨간 멍울이 들었다.
송소고택 맞은편에 위치한 덕천교회는 마을의 시계바늘을 수십 년 뒤로 돌려놓는 아이콘. 돌담에 둘러싸인 교회에는 지금도 청아한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무쇠종이 달려 있고 텃밭에서는 옥수수가 키 자랑을 하고 있다. 교회 옆에 위치한 ‘소슬자연빛깔’의 천연염색체험장에서는 빨랫줄에 걸어 놓은 황토색 천들이 바람에 펄럭일 뿐 주민들이 들일 나간 오후의 덕천마을은 적막하기 그지없다.
덕천마을은 땅거미가 깔리면서 활기가 넘친다. 들일 나갔던 남정네들이 하나 둘 긴 그림자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고 아낙들은 텃밭에서 풋고추와 호박잎을 따 저녁상을 마련한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제비들이 마을 앞 논에서 물수제비를 뜨듯 저공비행을 시작하면 청사초롱을 닮은 가로등들이 하나 둘 불을 밝힌다. 기다렸다는 듯 옥수수 삶은 구수한 냄새가 담장을 넘어 고샅길을 배회하고 노인들은 평상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
송소고택을 비롯한 한옥에서의 숙박체험은 잊지 못할 추억거리. 이부자리를 깔고 누우면 한옥의 창문으로 달빛과 별빛이 스며들고, 귀뚜라미와 풀벌레들은 하룻밤 묵어가는 나그네들을 위해 한여름밤의 음악회를 연다. 창호지에 어른거리는 달그림자의 유혹에 밤잠을 설치다 보면 어느새 동창이 부옇게 밝아온다.
아늑한 산들에 둘러싸인 덕천마을의 아침은 시시각각 변하는 한 폭의 풍경화. 봉선화 꽃잎으로 물을 들이면 이처럼 아름다울까. 아침햇살에 젖어 붉게 물든 구름이 소슬자연빛깔의 천연염색 천을 펼쳐놓은 듯 슬로시티로 거듭난 덕천마을을 감싼다.
청송=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