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찾아 다니며 복음 전하는 김기정씨 중병환자 말벗 30년
입력 2011-08-17 18:05
경기도 고양시 일산 국립암센터. 그는 환우의 발을 조심스럽게 씻겼다. 굳은살이 박인 거친 발은 주인의 노고를 말해주는 듯했다. “할아버지, 그동안 자녀들을 위해 이 두발로 걸어 다니시며 농사를 지으셨지요. 자랑스러운 발입니다. 수고 많이 하셨어요.” 폐암으로 투병 중인 할아버지는 눈물을 떨구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 마음이 이랬을까. 호스피스 교육을 통해 배운 발마사지를 정성껏 해드리던 그도 울컥했다. “첼로를 연주했던 제 손이 이렇게 환우들의 발을 씻겨주는 손이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어요.” 기관지 절개를 한 할아버지는 목소리를 잘 낼 수 없다. 김기정 권사의 말을 천천히 따라했다. “예-수-니-믄- 구주-” 쌕쌕거리는 거친 숨소리에 목소리가 묻혔다. “할아버지, 정말 사랑합니다.” 할아버지의 눈물은 무겁고 뜨거웠다. 오장육부에서 끌어올린 눈물, 그 눈물 속에 예수님이 계셨다.
지난 30년 동안 병원전도를 해 온 김기정(70·일산 거룩한빛광성교회) 권사는 희망과 절망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중병환자와 그 보호자들을 찾아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며, 위로를 나눠 왔다.
첼로 켜고 파티 좋아하는 여자
그의 부친은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로 처연하게 시작되는 ‘동심초’, ‘산에는 꽃피네 꽃이 피네’로 서정을 이끄는 ‘산유화’ 등을 작곡한 김성태(101)씨다. 그는 부친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아 서울 음대에서 첼로를 전공했다. 미션스쿨 이화여중고를 다니며 기독교를 접했지만 교회는 다니지 않았다.
1978년부터 20년 넘게 미국에서 살았다. 당시 남편은 삼성전자 뉴욕지사에 근무했다. 주말이면 집에서 댄스파티, 자선파티, 음악파티 등의 사교파티를 열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음악소리가 공허감을 달래주는 듯했다.
1981년 어느 날,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파티에 참석했던 대학 후배가 너무 안타까운 표정으로 손을 꼭 잡았다. “언니, 하나님은 살아계셔.” 순간 머리가 띵했다. 손님들이 돌아간 후 홀로 거실에 앉아 무릎을 꿇었다. “당신이 창조주라면 나는 누구죠? 십자가 사건과 부활 사건이 믿어지지 않지만 당신이 창조주라면 제가 이해할 수 있게 해주세요.” 매일 똑같은 기도를 했다. 파티는 점점 재미가 없어졌다.
기도를 시작한 지 석 달 정도 흘렀을 때였다. 집안의 창문은 모두 닫혀 있었다. 사도행전 2장 2∼4절 말씀 그대로 급하고 강한 바람이 불었다. 몸은 바닥에 있는데 마치 우주비행사가 유영하듯 했다. “주님, 이 큰 우주 안에 조그만 계집아이인 저를 어떻게 아셨어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그리스도께서 2000년 전 자신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그냥 믿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길 위에 선 도시 선교사
그 후 완전히 변했다. 모든 것이 감사했다. 당연하게 여겼던 남편의 배려와 선물까지도 감사했다. 설교테이프를 하루 종일 듣고 노트에 필기했다. 자꾸 눈물이 났다. 후배가 전해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말을 많은 이들에게 전하고 싶었다. 주일예배 후 할렘가와 맨해튼 버스터미널 등에서 외쳤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선교사처럼 전했다. 나가서 전하면 성령님께서 열매를 맺게 해주셨다. 1년 동안 300여명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20명의 전도 팀과 함께 미국 뉴저지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서 찬양사역을 했다. 본격적인 병원사역은 이때부터였다. “찬양을 시작하면 처음엔 아무도 쳐다보지 않았어요. 그러나 3∼4곡 정도 부르다 보면 사람들이 우리를 응시하기 시작해요. 소리를 지르던 사람들도 조용해져요. 그리고 함께 찬양을 해요. 그 순간 그곳이 천국 같았어요.” 2002년 남편이 한국의 중소기업 컨설턴트로 일하게 돼 미국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다.
은혜 가득한 ‘왕복 2차선 도로’
그에겐 이 사역이 받지 않고 주기만 하는 ‘1차선 도로’가 아니라 은혜 가득한 ‘왕복 2차선 도로’다.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삶의 포커스는 전도에 맞춰졌다. 일산 지역에 있는 국립암센터, 일산병원, 백병원, 힐링스병원 등을 순회하며 전도했다.
김 권사를 다시 만난 곳은 일산 힐링스병원이었다. 3년 전 설악산을 등반하다 실족해 하반신이 마비된 송기정(55)씨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있었다. “예전엔 마음에 분노가 많았어요. 요즘엔 누구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용서를 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권사님 때문에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예수님을 알게 됐어요.”
처음엔 김 권사를 본체만체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먼저 아는 체를 한다. “권사님 나도 기도해줘요” 휠체어를 타고와 김 권사의 팔을 툭 친 남성은 교통사고로 장기입원 중이다. 아내가 집을 나가버린 후 절망했던 그에게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배반하지 않습니다”라며 위로했었다. 그는 최근 부인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하며 미소 지었다.
또 교통사고로 오른쪽 팔을 잃고 얼굴의 상처로 대화를 기피했던 젊은 여성은 사람들이 자신을 무서워해 친구도 못 만난다며 엉엉 울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는 말씀을 읽어주며 토닥였다.
영혼의 귀향을 돕는 사람
병원전도를 다니다 보니 그는 말기 환자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그는 좀 더 효과적인 전도를 위해 최근엔 호스피스 교육까지 받았다.
김 권사가 지속적으로 만나온 한 20대 여성은 유방암 환자였다. 말기 암환자 대부분이 처음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믿는다. 병이 악화되면 실망해 믿음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병이 재발됐다는 그녀를 다시 만나러 갔다. 쳐다 보지도 않았다.
‘수도꼭지’란 별명을 가진 그녀의 엄마는 계속 울었다. 엄마는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제 딸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예요.” “그렇지요. 근데 어머니의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으니, 예수님은 얼마나 딸을 더 사랑하실까요. 아마 하늘나라 일등 비서관을 시키시려나 봐요.” 김 권사도 미처 생각지 못한 말이었다. 어머니는 천국에 대한 소망으로 위로를 받았다. “그녀가 하늘나라로 떠난 후 그녀의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어머니 요즘도 우세요’라고 했더니 ‘내가 왜 울어요. 우리 딸 천국 가고 나도 천국 갈 건데’라고 하시더라구요.”
김 권사의 스케줄 노트엔 빼곡히 뭔가 적혀 있다. 잠깐 보여 달랬다. 월요일엔 장로회신학대학 평생교육원에서 성경과 상담공부를 하고 화요일엔 101세 된 아버지를 간병하고 나머지 날은 일산지역 병원전도에 나선다. “아버지에게 ‘구주의 십자가 보혈로’란 찬송을 불러드려요. 나이가 많이 들면 대화는 힘들어도 노래는 할 수 있거든요. 아버지와 저는 찬양으로 대화해요.” 70세 딸이 101세의 아버지에게 찬양을 들려준다.
그는 요즘 85세 이후엔 기력이 없을 것을 대비해 전화상담교육도 받고 있다. “앞으로 제가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기간은 15년 정도라고 생각해요. 그때까지 열심히 전도하러 다니고 나중엔 전화상담할 거예요.”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기 위해 산다’는 그의 말이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글 이지현 기자 사진 곽경근 선임기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