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규·이영자 부부의 러브스토리… 포화 속 위문편지 사랑의 날개 달다
입력 2011-08-17 18:05
총탄은 폭우처럼 쏟아졌다. 미군 헬기의 기총소사에 아군도 쓰러졌다. 군인들이 나뒹굴고 팔다리가 잘려 나갔다. 군인들은 바위 파편에도 고꾸라졌다. 빗발치는 포화는 피아를 가리지 않았다. 일병 고환규의 눈앞은 아비규환이었다. 군인들은 바위 사이로 피했다. 간신히 찾은 틈은 좁았다. 고 일병은 밀려났다. 그를 밀친 병사는 비명을 지르고 쓰러졌다.
전쟁이 한창이던 1967년 베트남의 허리 혼바산은 요충지였고 악명이 높았다. 관목과 가시덤불이 뒤엉키며 시계(視界)를 갈아먹었다. 고지 앞뒤 급경사에는 속을 알 수 없는 천연동굴이 거미줄처럼 얽혔다. 고지에서 연합군의 군사시설이 내려다보였다. 국도가 능선을 타고 해안으로 뻗었다. 백마부대는 혼바산을 장악해야 했다. 베트콩은 출몰하며 한국군을 기습했다. 전투는 치열해서 아군 피해가 컸다.
고환규의 편지
39년생 고씨는 기독교 주간지 ‘크리스챤신문’ 기자였다. 앞서 61년 장로회신학대 석사 과정 중 퇴교됐다. 한 교수가 이단으로 몰려 교수직을 박탈당했을 때 학내에서 항의 시위를 주도한 게 발단이었다.
64년 월남 파병이 시작됐다. 종군기자를 자청했다. 거절됐다. 군복무를 하지 않은 탓이었다. 자원입대했다. 군종병으로 월남전에 투입됐다. 67년 5월 25일 현지에 상륙했다. 혼바산의 백마28연대에 배치됐다.
그해 여름 혼바산 전투를 치렀다. 목숨을 부지했다. 헬기는 위문편지를 실어왔다. 한 장이 던져졌다. 발신자는 서울대병원 간호사 이영자. 생면부지였다. 편지엔 ‘살아 돌아오라’고 적혀 있었다.
고씨에게 가족은 없었다. 그는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때 남하했다. 국민(초등)학생이었다. 피란 행렬은 포성에 흩어졌다. 미아가 됐다. 인파에 쓸려 대구까지 갔다. 보육원에서 자랐다.
고씨는 간호사 이씨에게 답장을 보냈다. 참전 과정을 설명했다. 전쟁 상황을 신문에 낼 테니 보라고 했다. ‘답장이 없으면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라’고 덧붙였다. 매달 두세 차례 편지를 주고받았다.
혼바산 전투 현장을 추풍낙엽에 빗댄 기사를 송고했다. 아군 총포에 한국군도 죽었다는 내용이었다. 편지지 뒷면에 깨알같이 써서 보냈다. 비상이 걸렸다. 추방, 군사재판 회부 등의 조치가 거론됐다.
사단 사령부로 전출됐다. 몇 달 뒤 교전이 벌어졌다. 부대는 포위됐다. 베트콩은 소총을 난사하며 압박했다. 한 아군 장교는 장갑차를 몰고 돌진했다. 적진을 뚫지 못하고 폭발했다. 혼전 끝에 위기를 넘겼다.
한국군은 전과를 축소했다. ‘따이한(한국인)은 살인자’라는 말이 현지에 돌고 있었다. 베트콩은 그들의 동포였다. 고씨는 인근 해안도시에서 대민 지원에 참가했다. 각국 군인이 어울렸다. 미군이 월급을 물었다. 한국군 병장은 46달러였다. 미군 병장은 1700달러였다. 미군 군목은 미국행을 제안했다.
이영자의 편지
간호사 이씨에게 3교대 병실 근무는 괴로웠다. 아침, 낮, 밤을 8시간씩 맞교대했다. 조가 바뀔 때마다 이씨는 비틀거렸다. 그는 40년 충남 논산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58년 간호고등기술학교에 진학하며 상경했다. 서울대 의대 부속이던 간호학교는 이듬해 간호학과가 됐다. 이씨는 재입학해 63년 졸업했다.
67년 월남전 참전자 명단이 신문 하단에 게재됐다. 위문편지를 장려하는 광고였다. 객지에서 싸우다 죽기도 하는 군인들은 안돼 보였다. 편지가 그들에게 위안을 준다고 광고는 설명했다. 이씨는 한 통만 쓰기로 했다. ‘나도 대한민국 국민이니까’하는 생각에서였다. 계급이 가장 낮은 사람을 골랐다. 상급자에겐 편지가 쏟아질 것 같았다. 참전자 명단 바닥에 ‘일병 고환규’가 있었다. 그에게 썼다.
답장이 왔다. 뜻하지 않은 일이었다. 위로할 생각이었지 소식을 주고받을 계획은 없었다. 고씨는 자신을 ‘서울 도련’으로 부르라고 했다. 시종일관 진지했다. 답장에 답장했다. 그는 외로워 보였다.
편지엔 전장의 일상이 담겨 있었다. 고씨가 전투 중 겪었다는 일은 끔찍했다. 그는 일사병으로 죽을 뻔했다고도 했다. 그가 썼다는 기사는 신문을 구독하지 않아 보지 못했다. 고씨는 정의감이 투철해 보였다. 그는 전쟁터에서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말했다. 명함판 사진을 주고받았다.
고씨는 늘 생애 마지막 편지를 쓰는 듯했다. ‘다음 편지를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자주 말했다. 이씨는 그의 생사를 확인할 유일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편지는 종종 끊겼다. 밀려서 한꺼번에 왔다.
고씨를 배우자로 생각한 적은 없었다. 고씨는 선교사가 되겠다고 했다. 이씨는 부모를 떠나 살고 싶지 않았다. 부모가 결혼을 재촉했다. 선을 봤다. 세무사라는 남자는 별로였다. 전역 직전 고씨는 미국에 갈 계획이라고 했다. 벌써 떠난 듯했다. 마지막 편지에서 고씨는 한국에 돌아온다고 알렸다.
만남
69년 5월 부산항에서 군함은 철병 군인들을 토해냈다. 그들은 가족 연인 친구와 뒤엉켰다. 부두는 웃음과 눈물로 범벅됐다. 그 틈에서 고씨와 이씨가 만났다. 편지에 동봉된 사진으로 서로를 찾았다.
귀국한 고씨는 전역했다. 편지는 얼마간 더 오갔다. 이씨가 충북 청주의 간호학교 강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고씨는 ‘기독공보’ 복간 작업에 참여했다. 66년 군사정권 때 폐간된 주간지였다. 70년 ‘한국기독공보’로 복간됐다. 고씨는 첫 편집국장으로 취임했다. 이씨는 그해 서울대병원으로 돌아왔다.
고씨는 자상하지만 바빴다. 회사에서 살다시피 했다. 이씨를 만나면 민주주의와 인권의 절실함을 역설했다. 함께 본 영화가 충무로 대한극장에서 상영한 ‘사운드 오브 뮤직’뿐이었다.
고씨는 김현승 박두진 박목월 황금찬 등 시인과 어울렸다. 회사 아래층 다방에서 시인들은 마담을 소개했다. “고 국장이 총각이니까 잘 사귀어 봐.” 이씨가 봤다. 마담은 고씨에게 붙어 “제 애인이에요”라고 했다. 분위기가 험해졌다. 고씨는 정색하고 말했다. “이 사람이 내가 결혼할 사람이오.” 두 사람은 71년 4월 결혼했다. 고씨는 일하다 예식 직전 나타났다.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가 주례했다.
편지 때문에
최근 봉천동 자택에서 만난 부부는 가까이 앉길 쑥스러워했다. 마주 보길 주문받고 얼굴은 맞댔는데 시선이 딴청이다. 고씨는 밖에서 이씨를 ‘그 친구’로 지칭한다. “대화를 잘 안 해요. 서로 바빠서”라고 고씨는 말했다. 결혼은 잘했다고 생각하느냐고 이씨에게 물었다. “뭐, 잘했다고 해야 하나.”
신혼 때 고씨는 유신헌법 철폐를 주장하다 고문당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를 조직하고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박종철 고문사건 대책위원장을 지냈다. 아들은 고등학생 때 “아빠, 정말 빨갱이냐”고 물었다. 아들이 “네 아빠는 간첩”이라는 전화를 받고 자란 사실을 고씨는 그때 알았다.
고씨는 79년 신림동에 관악교회를 세웠다. 빈민촌이었다. 결혼 당시 이씨는 고씨가 목회할 줄 몰랐다. “애초 목사를 하겠다고 했으면 결혼 안 했을지 몰라요. 부담스러워서.” 이씨는 “사모 역할은 못한다”고 선언했었지만 교회 일을 외면하지 못했다. 부부는 김밥을 팔아 판자촌에 쌀과 연탄을 댔다.
빈민은 90년대 도시개발과 함께 증발했다. 그들의 집이 허물어진 곳에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중산층이 유입됐다. 이씨는 96년 서울대병원에서 정년퇴직했다. 이듬해 말 고씨와 신장을 기증했다.
편지 이야기로 돌아갔다. “위문편지 쓸 땐 같이 살게 될 줄 상상도 못했어요. 무사히 돌아오길 바란다는 마음 말고 다른 생각은 없었거든요.” 이씨의 편지는 강렬했다고 고씨는 말했다. “그런 편지는 군인에게 유일한 휴식처였어요.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만 그땐 눈물만 쏟았죠.” 편지는 행방이 묘연하다. 여러 번 이사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부부는 몇 주간 집과 교회를 뒤졌지만 못 찾았다고 했다.
고씨는 뻐겼다. “지금도 나 좋다는 여자는 많아요. 황혼 이혼 많이 한다는데 나는 해도 아쉬울 게 없어요.” 이씨를 보며 덧붙였다. “하면 땅을 칠 거야.” 이씨는 대꾸했다. “해. 나도 아쉬울 거 없어.”
글 강창욱 기자·사진 홍해인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