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흥우] 李 대통령의 길

입력 2011-08-15 17:31


시간은 한 치의 어김이 없다.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도 1년6개월 남짓 남았다. 그나마 차기 대통령이 선출되는 2012년 12월 19일 이후에는 식물대통령이 된다고 봤을 때 이 대통령에게 주어진 시간은 1년4개월에 지나지 않는다. 대선 8개월 전 치러지는 19대 총선 결과에 따라서는 그보다 일찍 레임덕이 올 수도 있다.

우리 국민들은 전직 대통령을 평가하는 데 매우 인색하다. 김영삼 대통령은 재임 시 ‘역사 바로 세우기’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법의 심판대에 세웠다. 하나회를 척결하고, 금융실명제를 실시했다. 공직자 재산을 공개해 수많은 부정축재 공무원을 솎아냈다. 하나같이 혁명기에나 가능한 엄청난 일이었다. 여야 정권교체를 통해 뒤를 이은 김대중 대통령 측근들마저 “김대중 대통령이었다면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1994년 김일성 주석이 갑작스레 사망하지만 않았어도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도 그의 몫이 됐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은 그를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억한다. 역대 대통령 지지도 조사를 봐도 뒤에서 세는 게 훨씬 빠르다.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법한 치적들은 모두 잊혀지고 김영삼 하면 ‘IMF 외환위기’와 ‘아들과 측근들의 권력형 비리’를 떠올릴 뿐이다. 그럼 이 대통령 하면 국민들은 무엇을 먼저 떠올릴까.

이명박 정부와 전임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가장 큰 차이점은 대북정책에 있다. “다른 것 다 깽판 쳐도 남북관계만 잘되면 된다”며 남북문제를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뒀던 노무현 정부나 김대중 정부와 달리 이명박 정부에선 뒷방 보릿자루 신세로 떨어졌다. 햇볕정책을 ‘저자세 대북 퍼주기’로 규정하고 대선 사상 최다 표차로 탄생한 정부이니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때 부총리 부서였던 통일부를 없애려고까지 했던 이명박 정부다.

출발이 이럴진대 남북관계가 좋을 리 없다. 6·25 이후 최악이라는 평가도 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남북 간 체제 경쟁이 최고조에 달했던 1970년대와 80년대 군사독재 시절에도 당국간 고위급 대화 채널은 유지됐었다. 그러나 이 정부에선 단 한 차례도 가동되지 않고 있다.

요즘 자주 듣는 얘기가 통일부의 존재가치를 찾기 어렵다는 말이다. 이를 내다보고 통일부를 없애려고 했던 모양이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통일부를 ‘통 일이 없는 부서’ ‘통 일을 안 하는 부서’라고 빈정댄다. 물론 남북관계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데는 북한의 책임이 훨씬 크다. 금강산 관광객 피살사건, 천안함 격침, 연평도 포격 등 북한의 잇단 만행으로 남북관계가 경색된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북한이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남북관계 정상화의 첫걸음이라는 정부의 대북원칙은 지켜져야 한다. 하지만 이 원칙을 고수하는 한 북한이 당국 간 대화 테이블에 나설 가능성은 희박하다. 원칙을 지키면서 대화의 모멘텀을 유지해야 하는 정부의 딜레마다. 이 문제를 논의한 남북 비밀접촉이 실패로 끝나고 북한이 이를 공개할 때만 해도 남북관계가 회복 불능상태로 치닫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했다.

다행히 남북 6자회담 수석대표의 발리 비핵화회담 이후 관계 개선의 징후들이 조금씩 감지되고 있다. 하지만 갈 길은 멀다. 이 대통령은 지난 12일 통일고문회의에서 남북관계를 언급하면서 “아주 어려운 때도 길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어제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남북 간 상호신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궁즉통(窮則通)이라고 했다.

길은 우리가 먼저 내미는 손을 통해 열릴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남북) 정상외교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며 가장 효과적 수단이 된다”고 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국민 다수가 이 대통령 하면 먼저 토목(土木)을 떠올리는 상황을 이 대통령 스스로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이흥우 정치부 선임기자 hw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