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태수의 영혼의 약국

입력 2011-08-15 12:29

풋옥수수 철



봄에 김 목사가 예배당 앞자락에 붙은 귀때기 땅에 옥수수를 심었다. 긴 장마에 대궁을 키우고 높이더니 겨우겨우 알을 배었다. 그런데 학생 수련회를 떠나는 날, 아이들이 밭에 들러붙어 강냉이 수확을 하더니, 오늘 아침 희멀건 옥수수가 쓰레기장에 버려져 나뒹군다. 알이 채 여물지 않아 먹을 수 없었던 것이다. 농사를 짓고 살던 과거로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요즘 아이들은 언제 옥수수를 따야 하는지, 언제 심어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저 가게에서 물건 고르듯 고르는 것이다.

인류 문명을 거시적으로 보면, 수렵채집기와 농경문화시대로 나뉜다. 사냥과 채집에 의존하던 시대는 먹이도 집도 입는 옷도,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게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사냥으로 잡아다가 하루하루 때워가던 삶이었다. 그러나 농경문화시대로 넘어가면서부터 필요한 것을 제 손으로 직접 만드는 방법을 익히고, 원하는 것들을 미리 장만하고 비축해 두는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자 수렵채집기의 주거지였던 동굴은 집으로 바뀌었고, 산과 들판에서 사냥을 하던 곳은 논밭이 되었다.

여기까지는 초등학교에서 배운다.

이후의 문명사는 산업사회-지식. 정보사회-세계화 뭐, 이렇게 변했다고들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문명은 ‘세계화 시대’ 그런 게 아니라 ‘새로운 수렵채집시대’이다. 이유는 이렇다. 우리가 어렸을 때 팽이라는 게 있었다. 그때 우리는 팽이를 직접 우리 손으로 깎았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스스로 만들지 않고 상점에 가서 돈을 주고 산다. 이는 마치 활을 들고 들과 산으로 나가 필요한 것들을 채집하는 사냥과 같다. 그저 고르기만 하면 된다. 수렵시대의 활이나 창은 다만 돈이라는 화폐로 대치되고, 사냥터였던 산이나 바다는 상점이나 백화점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래서 사랑도 사냥이다. 오죽하면, 연애를 거는 게 아니라 보이 헌팅, 걸 헌팅이라고 할까. 농경시대에는 ‘재미가 깨 쏟아지듯 한다’고 했고, ‘가슴이 콩 튀듯 한다’고 했다. 모두 농사에 관련된 감정 표현들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다. ‘한탕 했다’, ‘내가 그녀를 찍었다’고 한다. 이 모두 수렵시대에 사냥감을 쏘고 찍는데서 쓰던 언어들이다. ‘한탕주의’도 있다. 세계화된 문명을 살면서 의식은 퇴화되어 사랑도, 삶도, 가치관도, 신앙조차 수렵채집시대 사냥꾼의 방식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채집과 사냥꾼의 한탕주의 생존 방식이 불안, 불확실성, 외로움과 불신을 증폭시킨다. 기독교은행을 만들겠다고 떠들썩하던 목사 무리들이 사기꾼이었다는 세속의 전갈에 문득, 거죽은 글로벌인데 속은 수렵채집기로 퇴화한 의식을 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