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김세원] 덜어내기
입력 2011-08-14 17:46
비 오는 날이 많다 보니 해가 나는 날이면 눅눅해진 옷장 문을 활짝 열고 햇볕 구경을 시킨다. 그런데 옷장 안을 들여다볼 때마다 걸려 있는 수많은 옷들이 요즘 나를 무겁게 누른다.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한 것들이라 정이 가서인지 쉽게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누군가 오랜 직장생활에 남는 것은 옷밖에 없다고 하더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버리기는 아깝기도 하고 다시 입어 볼 욕심에 간직하고 있는 것들인데 옷장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몇 차례 이사를 다니면서 가전제품이나 가구, 책은 많이 정리를 했는데 옷은 계속 끌고 다녔다. 책을 정리할 때는 조금은 고민을 했다. 책 한 권 한 권마다 언제 어디서 샀는지 기록하고 사인을 해서 보관하던 것들을 정리하려니 쉽지 않았다. 한동안은 마치 책을 수집하듯 사들여 서가에 꽂고는 흐뭇해하기도 했었다. 책을 다 읽지 못하더라도 두고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었다. 어떤 책은 서문만 읽은 것도 있고, 앞부분만 읽은 것, 목차를 보고 읽고 싶은 부분만 골라서 읽은 것도 있지만 그래도 책값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받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책 짐을 덜어내야 하는데 폐품처럼 버리기는 싫었다. 혹시 필요한 사람이 가져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관리실에 얘기하고 박스에 담아 재활용 코너에 쌓아 놓았는데 어느 날 보니 책이 없어졌다. 그렇게 영의 양식인 책은 잘 정리가 됐는데 이사를 몇 번 하면서도 옷은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난 비교적 정리를 잘 하는 편이다. 어떤 사람들은 책상 위에 책이나 서류, 잡동사니 등을 산더미 같이 어지럽게 쌓아 놓고 그 안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하면서도 제 일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 언제나 책상이 깔끔하게 반듯하게 정리된 상태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난 후자에 속한다. 매번 일이 끝나는 대로 책상을 정리해야 직성이 풀린다. 어질러진 책상에 앉아서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니 집중이 어려워 일하기가 힘들어진다. 그런 내가 해결하지 못한 것이 옷장이다.
걸린 옷은 수두룩하지만 일 년 내내 한번도 입지 않는 옷이 태반이다. 옷장 문을 열 때마다 빨리 옷 정리를 해야겠다는 눌림만 있을 뿐 손이 가지 않았는데, 마음의 짐을 덜어내는 심정으로 옷 정리를 시작했다. 버리기가 아까웠지만 내가 지금 사용하지 않는 것을 나누는 것이라고 마음을 바꾸니 생각보다 정리가 쉬워졌다. 대략 언제 어디서 얼마 정도를 주고 샀으며 그 옷을 입었던 때가 어떤 시점이었는지 추억하며 새벽이 되도록 정리를 했다.
옷들을 정리하고 나니 스트레스가 날아가고 체증이 풀린 것 같다. 마음의 공간이 그만큼 더 넓어진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면, 내 것이라고 다 끌어안고 소유하려는 마음이 오히려 자신을 왜소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지혜는 풀어내고 버리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불필요한 소유를 비워내고 놓아버리면 그 이상의 채움이 있으리라.
김세원 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