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문지방 넘기] 고독과 시련에 지친 ‘내 영혼’에 시편처럼 나지막이 말을 건네면…

입력 2011-07-28 18:04


시편을 읽어 보면 시인이 말하는 대상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선 시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말을 합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시 13:1) “하나님이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시 56:1) 이는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와 찬양입니다.

그 다음에는 회중을 향해 말을 합니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시 34:9)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너희여 그를 찬송할지어다”(시 22:23) “악을 행하는 너희는 다 나를 떠나라 여호와께서 내 울음소리를 들으셨도다”(시 6:8) 이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간증과 권고입니다.

또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시 116:7) 이것은 누구에게 하는 말일까요? 맞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내 영혼’에게 말을 건네는 시편은 그리 많지 않지만 깊이 묵상하고 음미할 만합니다. 같이 살펴볼까요? 우선 시편 42편과 43편에서는 ‘내 영혼’에게 던지는 말이 후렴처럼 반복되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 42:5, 42:11, 43:5) 시편 103편과 104편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권고로 시작하여 끝을 맺습니다. 마치 들어가는 문과 나가는 문에 빛나는 보석을 박아 놓은 듯합니다. 시편 146편은 어떤가요? 역시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자기 영혼에게 전하는 말은 대부분 위로와 격려의 말입니다. 책망이나 비난의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너는 왜 신앙생활을 그 따위로 하니?” “그러고도 성도라고 할 수 있니?” “하려면 제대로 해라” 이런 말은 전혀 없습니다. 낙망과 좌절에 빠져 있는 자신의 영혼을 달래고 위로하며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습니다. 지치고 쓰러진 사람을 위로하듯이 시인은 자신의 영혼에게 슬며시 다가가서 말을 건넵니다. 시인의 영혼에게 시인 자신이 위로자요 치료자가 되고 있습니다.

저도 한 번 시인처럼 자신의 위로자가 되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저의 영혼이 마치 물 댄 동산처럼 힘이 솟고 기운이 넘치는 것을 느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해 보십시오. 우선 자신의 결점이나 허물은 한 손으로 살그머니 덮어주고 잘하는 것, 칭찬할 만한 것, 기특한 것만 골라 칭찬하고 격려해 보십시오. 그리고 의기소침하지 않도록 등을 두들겨 주면서 힘내라고 말해 주십시오. 기도하다가도 잠깐 멈추고 “내 영혼아” 부른 다음에 그렇게 해 보십시오.

우리 영혼의 친구는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아픔과 상처를 온전히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사람들이 떠난 후 우리 영혼은 고독과 허전함에 더욱더 몸부림치지 않았나요? 우리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 영혼이 심히 지쳐 있을 때, 사망의 문 앞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우리 곁에 아무도 참된 위로자가 없을 때 나지막한 음성으로 ‘내 영혼’에게 말을 건네 보십시오. 틀림없이 영혼의 소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종윤 목사 (군산 대은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