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김진희] 오바마의 고통스런 선택
입력 2011-07-26 17:43
미국은 채무불이행 국가로 전락할 것인가? 벼랑 끝에 몰린 미국이 벌이는 부채한도 증액 협상에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신용평가 업체 무디스는 미국을 ‘부정적 관찰대상’에 포함시켰고 해외 언론은 세계경제를 걸고 도박하는 미국 정계를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시한에 임박해 공화당이 일정한 양보를 얻어낸 뒤 증액에 결국 동의할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디폴트 여부보다 워싱턴을 달구는 양당의 타협 내용이 더 흥미로운 이유다.
‘복지삭감’ 비난여론 높아
오바마는 ‘복지삭감’과 ‘부자증세’라는 절충 패키지를 제시했다. ‘부채한도 증액’을 의회에서 인준 받으려면 공화당이 요구한 재정적자를 줄일 방안을 어쨌든 제시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은 복지예산 삭감이 걸리고, 공화당은 부자증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곤혹스럽기는 오바마도 마찬가지다.
서민복지를 추구해 온 민주당의 전통적 노선을 버리면 오바마의 지지기반이 흔들릴 터이지만, 부채한도 증액을 승인받기 위해선 고통스러운 선택이었다. 2012년 대선을 겨냥해 실용주의적 노선으로 선회하고 싶었던 계산도 작용했다. 민주당은 어설프게 입을 다물었는데, 정작 공화당 초선 의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티파티 선풍으로 당선된 이들이 ‘부자증세 불가’를 선언해 협상을 결렬시킨 것이다. 오바마 행정부의 실정을 부각시켜 차기 대선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한 정치적 고려가 깔려 있다.
오바마는 협공의 화염에 휩싸였다. 재정적자의 주 원인은 전쟁비용과 부유세 감세인데 오히려 서민의 삶을 위협하는 복지축소안을 협상 카드로 제시한 것이 진보 진영을 들쑤셨다. 금융투기세가 협상에서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는 사실도 공분을 자아냈다. 노동자와 서민들은 부유세 감세, 월스트리트 실책의 피해가 고스란히 서민에게 돌아온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미국노동총연맹(AFL-CIO)은 사회복지에 대한 예산 삭감에 반대하는 대대적인 저항운동을 제안했다. “워싱턴 예산안의 희생양은 노동자, 중간계급, 노인과 빈민일 뿐”이라는 노동총연맹 위원장 트럼카의 주장도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복지 삭감에 대한 학계의 반론도 드세다.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과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사회복지를 경제위기의 주범으로 꼽는 사람들을 맹비난하면서 복지예산을 삭감할 경우 오히려 성장잠재력을 훼손시킬 우려가 있다고 강력히 경고한다. 그러나 오바마는 스티글리츠가 ‘상위 1%를 위한 정당’으로 전락했다고 비판하는 공화당과 저자세 협상을 구걸해야 하는 모양새다.
루스벨트에서 교훈 얻기를
여기서 오바마는 자신의 정치적 영웅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대공황을 어떻게 대처했는가를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재선 도전을 한 해 앞둔 1935년, 루스벨트는 사회보장법과 전국노사관계법, 공공사업청을 추진하며 일자리 창출과 노동·복지정책을 강화했다. 보수 언론과 보수 정치인들, 대자본가들은 루스벨트를 사회주의자, 파시스트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가 추진했던 ‘큰 정부 정책’과 적자재정안이 도마 위에 올랐을 때 루스벨트는 오히려 “조직자본에 의한 정부는 조직폭력에 의한 정부만큼 위험하다”고 응수했고 ‘노동할 권리’와 ‘인간적 삶을 위한 경제적 권리’를 수호하는 것이 정부의 기본 의무임을 천명했다. 국민은 1936년 선거에서 압도적 표차로 그를 당선시킴으로써 화답했다. 루스벨트에게 복지는 정치·경제적 위기 극복의 견인차였던 것이다.
오바마가 택한 벼랑전략이 의회를 통과한다면 미국은 당분간 채무위기를 넘기겠지만 복지 축소로 인한 ‘보이지 않은 손실’이 미국을 ‘위험사회’로 전락시킬 개연성이 크다. 1980년대 영국이 그랬다. 서민복지를 재정적자 축소와 맞바꾼 정권의 앞날은 언제나 험난했다. 오바마의 ‘일시적’ 재정 성공이 ‘영원한’ 정치 실패를 예고하는 이유다.
김진희(경희사이버대 교수·미국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