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신학강좌] 예수는 누구인가

입력 2011-07-24 17:53


(55) 나와 복음

마가복음이 끝나는 부분 그러니까 예수의 길이 끝나는 지점에는 온통 ‘믿는다’는 표현이 가득하다. 힘을 가진 세 집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장로들이 예수님과 마주 부딪친 까닭은 그들이 예수를 믿지 않아서다. 마가복음 14∼16장을 짧게 줄이면 그런 얘기다. 유대 사회의 리더들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 성경을 읽는 평범한 독자는 얼른 그들의 불신앙을 읽어낸다. 맞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믿지 않았다.

진리의 선포와 마음의 불신앙이 아주 날카롭게 대립해 있었다. 마지막으로 갈수록 대립의 칼날은 예리해진다. 조금이라도 닿으면 손이 베이고 몸이 베일 정도로 새파랗게 날이 선다. 예수를 죽이려는 쪽에서 날이 서는 모습을 보라. 그들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예수를 죽이려 한다. 하나님 말씀에 목숨을 건 사람들 바리새인이 헤롯당과 정치적 타협을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죽으러 가는 사람 예수님에게 겨누는 날선 모습을 보라. 예수는 자신을 완전히 내어맡긴다. 아무런 변론도 하지 않는다. 무섭게 날을 세우는 것이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장로들에게 기득권을 지키려는 이기주의가 가득했다고 보인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상황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다. 바리새인이 누군가. 율법 전문가다. 사두개인이 누군가. 성전 제사의 전문가다. 장로들은 또 누군가. 이스라엘의 신앙 전통을 현실에 어떻게 적용하며 구체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생존해야 하는가를 짊어진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수의 가르침이 예와 아니요 둘 중 하나로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맞다. 예수는 그렇게 가르쳤다.

예수의 가르침에서 핵심이 이것이다. 구약의 말씀을 이렇게 저렇게 해석하며 가르치는 선생은 많았다. 예수 이전에 선지자도 많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과 달랐다.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에서 ‘권위’를 느꼈다고 성경은 기록한다. 권위 또는 권세로 번역된 헬라어는 ‘엑수시아’ 곧 전권을 뜻한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전권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선포했다. 하나님을 아빠라고까지 부를 수 있었다.

예수님의 전권 선언이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기록돼 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이 요청하는 헌신에서 어느 것이 가장 어렵게 보이는가. 집과 전토 곧 부동산인가? 형제자매나 부모인가? 자녀 아닌가?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바치라고 요청한다. 그런 헌신에 백 배의 보상을 약속한다. 일반적으로 들으면 사기꾼들이 하는 말하고 구조가 거의 같다. 거기에다 내세까지 약속한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핵심은 이런 것이 아니다. ‘나와 복음’이 핵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예수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 말이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이걸 알았다. 전문가니까. 그들 입장에서 이것은 신성모독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게 예수의 길이고 소명인 것을. 삶과 일과 말이 곧 복음이요 하나님 나라인 예수, 이분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여기에서 모든 게 결판난다.

지형은 목사(서울 성락성결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