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선비들 詩心 사로잡은 수묵화 한 폭… 함양 지리산 계곡과 금대산

입력 2011-07-20 17:40


“최근 내린 비에 불어난 시냇물이 돌에 부딪혀 솟구쳤다가 부서지니 마치 만 섬 구슬을 다투어 내뿜는 듯하기도 하고,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으르릉거리는 듯하기도 하며, 희뿌옇게 가로지른 은하수에 별들이 떨어지는 듯하기도 하였다.” 1558년 봄에 지리산 천왕봉을 오른 남명 조식(1501∼1572)은 ‘유두류산록(遊頭流山錄)’에서 큰비로 불어난 지리산 계곡의 풍경을 한 편의 시처럼 표현했다. 그는 또 “검푸른 못은 헤아릴 수 없이 깊었고, 우뚝 솟은 돌들이 셀 수 없이 널려 있었다”며 지리산 계곡의 풍치를 세밀화처럼 그렸다.

오랜 장마로 지리산 한신계곡을 비롯한 경남 함양의 명산 계곡들이 불어난 물로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명주실을 꼬아 만든 비단처럼 혹은 흰색으로 혹은 옥색으로 흐르던 계류가 폭포에서 떨어지는 굉음은 오케스트라의 웅장한 화음을 무색하게 한다.

계곡미의 극치를 자랑하는 한신계곡은 백무동에서 세석평전까지 10㎞를 영롱한 구슬이 구르듯 맑고 고운 물줄기가 사철 흐르는 폭포의 연속이다.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낄 정도로 깊고 넓은 한신계곡의 출발점은 백무동야영장. 능선을 타는 왼쪽 길은 하동바위를 거쳐 장터목에 오르는 최단거리 등산로다. 남효온 양대박 등 조선시대 선비들이 대부분 이 길로 천왕봉을 올랐다.

남강 상류인 한신계곡의 첫 번째 폭포는 바람폭포로도 불리는 첫나들이폭포. 계곡과 절벽을 사이에 둔 평탄한 오솔길을 2㎞ 정도 걸으면 시야가 확 트이면서 첫나들이폭포가 천상의 화음으로 맞는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철다리 아래의 너럭바위를 쏜살같이 달려온 계류는 목이 좁아지는 바위에서 폭포수로 변해 굉음을 토한다.

첫나들이폭포에서 두 번째 폭포인 가내소폭포까지 약 700m 구간은 한신계곡에서 풍광이 가장 아름다운 곳. 계곡을 가로지르는 서너 개의 철제 다리를 건너는 동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와폭과 반석, 그리고 크고 작은 못과 바위들이 저마다 맵시를 뽐낸다.

등산로에서 살짝 벗어난 가내소폭포는 폭포수와 넓은 반석, 그리고 울창한 숲이 어우러진 절경 중의 절경. 15m 높이에서 쏟아지는 폭포수는 공명현상을 일으켜 지축을 흔들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소에서 피어오른 물방울들은 물안개처럼 피어올라 숲속을 떠돈다.

폭이 한층 좁아지고 가팔라지기 시작한 등산로를 오르면 오층폭포가 나오고, 다시 계곡을 건너면 최상류에 위치한 한신폭포가 나온다. 이곳에서 1㎞를 더 오르면 세석평전이지만 길이 험하고 가팔라 천왕봉 등반을 목표로 한다면 백무동야영장에서 장터목으로 가는 능선을 타는 게 좋다.

지리산이 품고 있는 함양의 계곡 중 아름답지 않은 곳이 어디 있으랴. 지리산자연휴양림 아래에 위치한 삼정계곡도 계곡미가 뛰어나고 접근성이 좋아 여름 피서지로 인기가 높다. 하정마을 앞에 위치한 삼정솔숲의 선유정은 지리산판 나무꾼과 선녀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 하늘에서 무지개를 타고 내려왔던 선녀가 나무꾼과 행복하게 살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자 나무꾼이 세 자녀와 함께 선녀를 기다리다 죽었다는 슬픈 이야기가 전해온다.

지리산 계곡의 속살을 엿보았다면 이젠 멀리서 지리산의 웅자를 감상할 차례. 당연한 말이지만 지리산에서는 지리산의 전체를 조망할 수 없다.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30㎞ 구간에 해발 1000m 이상의 봉우리가 10개가 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리산에서 한 발 물러나면 지리산이 한 폭의 병풍처럼 보이는 곳이 있다. 해발 847m에 불과한 마천면의 금대산이 바로 그곳이다.

지리산이 한 폭의 걸개그림처럼 보이는 곳은 금대산 중턱에 위치한 금대암의 전나무 앞. 임도를 달리다 보면 다랑논으로 유명한 마천 군자마을도 한눈에 들어온다. 수령 500년에 둘레가 4m인 금대암 전나무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유람기에도 자주 등장하는 나무로 현존하는 전나무 중 최고 수령과 크기를 자랑한다.

그러나 지리산의 전경과 주변 산세까지 사방팔방으로 한꺼번에 보려면 금대산 정상에 올라야 한다. 이른 아침 수풀을 헤치고 희미한 등산로를 따라 정상에 오르면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해발 평균 1300m 이상의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고개를 좌우로 돌리면 산청의 왕산은 물론 함양의 크고 작은 산들이 중중첩첩 포개져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그 중심에 금대산이 우뚝 솟아 있다.

금대산 정상 바위 위에서 맞는 지리산의 아침은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화나 다름없다. 한신계곡과 칠선계곡 등 지리산 골짜기에서 피어오른 운무가 구름과 맞닿아 한 폭의 수묵화를 그린다. 솜이불처럼 두텁던 운무가 흩어지자 그 사이로 햇살이 쏟아진다. 중봉과 하봉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고단 반야봉 토끼봉 명선봉 등 지리산의 나머지 봉우리들도 질세라 구름모자를 벗는다. 그러나 천왕봉은 비경을 함부로 보여주지 않으려는 듯 구름 속에서 꿈쩍을 않는다.

1472년 여름에 천왕봉을 오른 함양군수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은 “산등성이를 따라 걸어가니 지나는 구름이 갓을 스쳤다”는 운치 있는 기행문을 남겼다. 1586년에 지리산을 세 번째 찾은 의병장 양대박(1543∼1592)은 “오목하고 휑하고 우묵하고 움푹한 계곡이 푸른빛과 흰빛으로 어우러져 숨김없이 드러나 보였다”며 지리산 계곡이 마치 천만 겹의 수묵화를 그려놓은 병풍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운기(雲氣) 자욱한 지리산에서 기다란 무지개가 피어올랐다고 기록했다.

순간 지리산과 금대산 사이의 골짜기를 가로지르는 무지개가 피어오른다. 양대박이 목격했던 바로 그 무지개이자 지리산 선녀가 타고 내려왔다던 전설 속의 무지개다. 운무로 만든 하얀 옷을 걸친 지리산 선녀가 무지개를 타고 전설 속의 나무꾼을 찾아 삼정계곡으로 하강이라도 하는 걸까. 함양의 산하를 보듬은 지리산이 더욱 신비로워 보인다.

함양=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