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조미자] 코끼리 똥과 괭이밥

입력 2011-07-19 19:43


아는 선생님이 나에게 사각형 종이를 주었다. 누르스름한 빛깔에 손안에 쏙 들어갈 만한 크기이다. 만져보니 톡톡한 질감이 부드럽다. 한쪽에는 잘 말려 눌러둔 꽃이 붙어 있다. 노란 괭이밥이다. 이름을 써서 명함으로 사용하기에 좋단다. 생화가 있는 명함이라니. 단번에 맘에 들었다. “그런데 이게 뭐로 만든 종이인지 맞춰보세요.” 그녀가 묻는다. “폐휴지인가요?” 도리질하는 그녀를 보고 궁금증이 커졌다. “코끼리 똥이에요” 하는 소리에 나는 똥으로 어떻게 종이를 만드느냐고 물었다.

케냐, 파키스탄, 호주, 태국은 코끼리 똥으로 종이를 만든다고 한다. 코끼리는 하루 200∼250㎏의 풀을 먹고 50㎏의 똥을 싸는데 섬유질인 셀룰로오스는 소화시키지 못하고 똥으로 배설한다. 환경을 오염시키는 똥의 셀룰로오스를 이용해 앨범이나 공책을 만들어 파는데 친환경 자연제품으로 인기가 대단하다고 한다. 국내에서도 만드느냐니까 그녀는 자신이 직접 코끼리 똥 종이를 만든 이야기를 해준다. 똥을 깨끗이 씻은 뒤, 다섯 시간 끓이면 불순물과 악취는 빠지고 셀룰로오스만 분리된다. 이것을 잘게 잘라 색을 입히고 죽처럼 끓인 뒤에 한지(韓紙) 뜨듯 체에 거른다고 했다. 그런 후 햇빛과 바람에 말려 표면을 평평하게 밀면 완성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녀가 전에도 달팽이 점액으로 만든 크림이라며 얼굴에 발라보라고 했던 기억이 났다.

지난주엔 물소리에 잠이 들고 물소리에 아침을 맞았다. 잠시 비가 멈춘 틈을 타 산책했다. 집 옆 운중천에 나가면 물소리에 귀가 멀 것만 같았다. 길을 걷다 보면 발아래 달팽이가 제 집을 이고 기어갔다. 나는 달팽이를 밟을세라 옆으로 비켜갔다. 등에 검은 줄이 세로로 그어진 울퉁불퉁한 두꺼비도 길가에 나와 있었다. 눈을 뒤룩거리며 양쪽 배를 불룩거리고 있었다. 다리 위를 지나가면 난간 사이로 거미들이 집을 지었다. 방사선으로 거미줄을 만드느라 원을 그리며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 거미줄에 빗방울이 맺혀 은구슬을 만들고, 날벌레들이 버둥거리고 있었다.

굼실거리며 빠르게 흘러가는 천변의 물살을 내려다보았다. 물가에는 수줍은 듯 가느다란 줄기에 망초 꽃잎마다 빗방울을 달고 있다. 망초의 순정한 흰 빛깔을 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산에서 입었던 하얀 치마저고리가 생각났다. 더 내려가다 보면 달맞이꽃이 물소리를 듣고 키를 키우고 있다. 비에 함초롬히 날개를 접은 노란나비처럼 피어 있다. 나는 습기 많은 장마에 오히려 마음이 평온해진다. 바쁘다며 황량하고 건조하게 사는 내 삶에 촉촉함과 여유를 주는 것 같아서이다. 장마가 끝나면 물소리 대신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잎새에 수런거리는 바람 소리가 들려올 것 같다. 비가 그치면 풀섶을 헤치고 괭이밥 꽃을 찾아보고 싶다.

나는 코끼리 똥으로 만든 종이에 파란색 잉크로 내 이름을 적어보았다. 직위도, 전화도, 메일도 없는 단지 이름 석 자. 불현듯 무소의 뿔처럼, 그물을 지나가는 바람처럼, 자연인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미자 (소설가)